소설처럼/다니엘 페나크/이정임 옮김/문학과지성사
“또 해 줘.” 우리는 이 말을 잊은 지 오래다. 잠드는 머리맡에서 아빠 엄마가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면 우리는 그렇게 말하곤 했는데….
발레리는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받는 자리에서 ‘또 해 줘’의 추억을 말했다. “나 또한 하고많은 마법사며 괴물, 해적, 요정 따위를 끊임없이 지어내느라 얼마나 많은 시간을 바쳐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진이 다 빠져버린 아빠에게, ‘또 해 줘’ 하며 졸라대곤 했습니다.”
아버지가 저녁마다 장부의 수지타산을 맞추는 일만 했던 프란츠 카프카는 어린 시절, 이런 일기를 남겼다. “어른들은 저녁 나절, 한참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빠져 있는 아이를 결코 납득시킬 수 없을 것이다. 이제 그만 책을 읽고 자야만 하는 이유를 강변하는 어른들만의 논리를 아이는 결코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말로센 연작소설, 까모 시리즈 등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프랑스 소설가 페나크(Pennac·60)의 이 책은 아이들에게 어떻게 소설(책)을 읽힐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다. 첫 번째 주문은 소설을 큰 소리로 읽어주라는 것이다. 카프카가 막스 브로트(카프카 전집의 편집자이자 그의 친구)에게 ‘변신’을 읽어주면서 눈물이 나도록 웃어 젖혔던 것처럼, 강가에 앉은 마르탱 뒤가르가 앙드레 지드에게 ‘티보가의 사람들’을 읽어주었던 것처럼, 소리내서 책을 읽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한 도스토예프스키가 아예 처음부터 아내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에게 큰 소리로 글을 불러주며 ‘죄와 벌’을 썼던 것처럼 말이다.
문제아만 모아 놓은 35명 학급에서 소설을 읽어주면 마치 거짓말 같은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페나크는 단언하고 있다. 처음에 심드렁하던 아이들이 점차로 책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을 하게 되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그리고 새로 읽은 책 경험을 말하게 될 것이다.
둘째로는 어떤 경우에도 ‘책을 읽어야 한다’는 투의 강제를 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다. 아이들은 소설이란 무엇보다 하나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다. 소설은 ‘소설처럼’(원제: Comme un Roman) 읽혀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이야기를 원하는 우리의 갈구를 채우는 일이라고 페나크는 거듭 강조하고 있다.
▲ 다니엘 페나크는 '책(소설)을 읽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어떻게 읽는 것이 재미있게 읽는 것인지 몇 가지 귀중한 힌트를 주고 있을 뿐이다. | |
페나크는 “소설이 주는 진정한 즐거움은 작가와 나 사이에 형성되는 그 역설적인 친밀감을 발견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홀로 씌어진 그(작가)의 글이 혼자서 소리 없이 읽어내리는 나의 목소리에 의해 비로소 하나의 작품으로 되살아난다”는 것이다.
페나크는 소설을 읽는 즐거움을 얻기 위해 시간과 장소를 확보하는 요령까지 말해 주고 있다. ‘책 읽는 시간은 언제나 훔친 시간’(마치 글을 쓰는 시간이나 연애하는 시간처럼)이므로 ‘재킷을 살 때는 먼저 주머니의 크기가 포켓판인지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소설을 읽을 환경이 안 된다고? 카프카는 잇속만 차리는 아버지를 거역하면서 읽었고, 플래너리 오코너(미국 여성작가)는 “아니 ‘백치’가 뭐냐? 그런 책만 싸고 돌다가 너도 그 꼴이 될라” 하던 어머니의 이죽거림을 들어가며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었다. 티보데는 베르? 전선의 참호 속에서 몽테뉴를 읽었고, 앙리 몽도르는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했던 당시 암시장에서 구한 말라르메의 시를 탐독했다.
세번째로 페나크가 권하는 말은 ‘아이들이 자연스레 책읽기에 길들게 하려면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용을 묻지도 말고, 독후감을 요구하지도 말고, 책에 대한 사전 지식을 동원하지도 말 일이다. 그 어떤 질문도 하지 말라. 책이란 우리 아들딸이 설명하라고 씌어진 것이 아니라, ‘마음에 들면’ 읽으라고 씌어진 것이다. 독서를 하면서 가장 먼저 누릴 수 있는 권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권리다.
또 ‘이 책을 다 읽으면 TV를 보게 해준다’는 식으로 TV가 책보다 선망의 포상이 되도록 하지 말라. 청소년용 다이제스트를 만들지도 말라. 아니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아이가 보기에 지나치게 복잡하다는 구실로 화랑 큐레이터 중 누군가가 다시 그려보겠다고 덤비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