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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ucc.media.daum.net/uccmix/news/foreign/europe/200403/10/yonhap/v6278306.html?u_b1.valuecate=4&u_b1.svcid=02y&u_b1.objid1=16602&u_b1.targetcate=4&u_b1.targetkey1=17159&u_b1.targetkey2=6278306 영국도 이공계 별로라고 들었고 프랑스도 그렇다는 군. 미국 외의 국가에서는 대부분 이공계 별로 인가보다;; 미국도 이공계보다 법대, 의대가 인기 있지만 못해먹겠다는 기사까지는 아직 안나오니까.
http://ucc.media.daum.net/uccmix/news/culture/book/200403/06/ohmynews/v6260962.html?u_b1.valuecate=4&u_b1.svcid=02y&u_b1.objid1=16602&u_b1.targetcate=4&u_b1.targetkey1=17137&u_b1.targetkey2=6260962 인터넷 여론 재판과 '타인의 고통'   [오마이뉴스 이강룡 기자]   ▲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2004 이후 카메라가 발명된 1839년 이래로, 사진은 죽음을 길동무로 삼아 왔다. (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46쪽 ) 고통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격렬한 것이었다. ( 같은책, 65쪽 ) 인터넷 여론의 형성 웹은 다양성의 천국이다. 웹의 다양성은 오프라인 사회가 그만큼 다양해졌다는 것의 반증이기도 하지만 시간과 공간, 그리고 오프라인에서 필연적으로 닥칠수밖에 없는 많은 제약들로부터 자유롭다는 점에서 훨씬 더 다양하고 자유로운 형식의 담론이 형성된다. 자신의 관심 분야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누고, 정보와 지식을 나누고, 나와 다른 의견에 대해 토론하고 해결책을 모색한다. 효순, 미선 두 중학생의 죽음에 작은 촛불들이 횃불을 이루었던 일은 인터넷 여론 형성의 상징이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네티즌의 의견은 오프라인의 논의 사항에 대한 참조 자료 정도로 활용될 뿐이었다. 하지만 국민과 네티즌의 교집합 부분이 점차 확대되고 네티즌이 여론 형성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게 되면서, 인터넷 여론은 무시할 수 없는 목소리의 수준을 넘어 이미 어떤 행위의 다음 단계를 결정하는데 있어 빠뜨릴 수 없는 필수 고려 사항이 됐다. 인터넷이 여론 형성의 유용한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은 적은 노력으로 많은 이들에게 전파되고, 이 결과로 여론을 모으기에 다른 어떤 방법보다 효율적이라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최근 네티즌 여론 조사에서 청계천 공사를 멈춰야 한다는 의견이 80%를 차지하기도 하여, 서울시는 꽤 큰 부담을 안은 상태에서 향후 공사 계획을 고민하게 됐고, 멋없는 자동차번호판 때문에 건설교통부 홈페이지는 몸살을 앓았으며, 축구협회 게시판에는 축구대표팀 후원사인 나이키사가 제작한 새 유니폼의 디자인을 비난하는 의견이 가득했다. 비난과 비판이 뒤섞여 있지만 발전을 위한 모색이라고 볼 수 있다. 인터넷 여론 재판    ▲ 모 포털 사이트에 실린 '강도 얼짱' 검거 기사   인터넷 여론이 비판을 넘어 ‘재판’ 이 돼버리는 경우가 있다. 이른바 ‘강도 얼짱’ 이라고 불린 최근의 사건은 한 인간의 인권을 무참하게 유린한 행위였다. 적절한 죗값을 치르고 갱생의 길을 갈 수도 있었던 한 사람의 범죄자가 인터넷을 통해 알려지면서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여러 일들이 벌어졌고, 결과적으로 개인으로서는 평생 지우지 못할 상처를 입고 말았다. 인터넷 여론 재판이 부른 비극의 적나라한 단면을 볼 수 있는 사건은 소위 ‘왕따 동영상 파문’ 이라고 불렸던 사건이었다. 네티즌의 비난이 오프라인의 여론으로 확대되면서 결국 학교장 자살이라는 비극을 불러온 것이다. 한 사람의 죽음 앞에 더 이상의 여론 재판은 중단됐지만 네티즌이 내린 1심 판결은 고스란히 기록으로 남았다.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한다는 것은 어떤 이야기를 떠올린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진을 불러낼 수 있다는 것이 돼버렸다"라고 적고 있다. 시간이 많이 흘러 그가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났을 때, 우리의 의식은 현상수배전단에 실렸던 ‘강도 얼짱’ 의 사진을 불러들일 것이다. 인터넷 여론 재판은 ‘댓글 저널리즘’ 이라고도 불리는 건전한 비판에서 시작하여 관련 홈페이지로 옮겨가기도 하고, 종종 네티즌의 표적이 될 만한 ‘희생물’을 만들어 그에게로 전이되기도 한다. 댓글 저널리즘이란 각종 매체에 보도된 기사에 대해 비판적 시각의 의견을 달아, 언론 보도의 선정성이나 수준 미달의 기사를 비판하기도 하고, 간혹 오보를 바로잡기도 하는 일련의 행위를 말한다. 인신공격이나 논점을 빗나간 비난으로 사건의 본질을 흐리기도 하는 점은 그것의 어두운 면이다. 순기능과 역기능의 혼재는 댓글 문화의 필연적 양면성의 발로이기에, 댓글을 통해 토론에 참여하는 네티즌의 개인적인 판단력과 비판의식만이 그 수위를 조절할 수 있을 것이다. 인터넷 여론 재판 과정을 단계별로 살펴보자. 먼저 댓글로 심판하고, 해당 사건과 관련된 홈페이지 게시판에 비판적 메시지를 남겨 또 한 번 심판하고, 사건을 비꼰 합성 사진이나 플래시 무비, 동영상 등의 패러디 저작물 생산, 유포하여 또 다시 심판대에 올리고, 만일 이런 자료가 언론 매체의 주목을 받아 보도된다면 또 한 번 강력한 심판 기능을 발휘하게 됨을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건강한 비판이라면 네 번의 비판은 잘못된 사건이나 행위를 바로잡기 위해 필요한 강력한 논거가 되어, 악덕을 교정하는데 상승효과를 발휘할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그야말로 피해자를 네 번 죽이는 행위가 되고 말 것이다. 군대 위안부 누드 사건에서 이승연씨는 결코 비난을 피할 수 없지만, 이승연씨가 이 사건에서 네티즌의 분노를 고스란히 수렴하는 ‘마녀’가 된 것도 사실이다. 악덕을 보고 분노하고 성토하는 것은 건강하지만, 이런 분노를 손쉽게 쏟아낼 만한 희생물을 만드는 마녀사냥의 행위는 참으로 위험하기 그지없다. 오래 전의 일이지만, 자책골 때문에 팀이 패했다는 이유로 괴한에게 피살된 콜롬비아의 축구 선수 에스코바르를 떠올리게 한다. 어머니 시신을 몇 개월째 방치했다는 중학생 송군 이야기에서 그의 담임 선생님이, 성토해야 할 악덕의 대상이 됐었다는 점을 돌아봐야 한다.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말이다. 한 번 죽인 이를 잘못된 판단으로 또 한 번 죽이고 세 번, 네 번 죽이는 일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분노의 표출 방식에 대해 우린 아직 경험치가 부족한 것인가 아니면, 분노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 그 개별적 판단 과정에 간혹 혼란을 일으키곤 하는 것일까. 우리는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마녀를 찾아내고 또 그들을 공개 처형할 것인가. 인터넷 여론 재판의 위험성에 대해 책임을 묻는다면 포털 사이트의 선정성을 빠뜨릴 수 없다. 포털 사이트가 선정적으로 흐르는 건 상업성의 당연한 발로이겠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포털 사이트를 통해 각종 정보를 얻고 있고, 비정상적이긴 하지만 어쨌든 미디어의 기능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난받아야 할 부분이 적지 않다. 포털 사이트가 검증되지 않은 이슈들을 선정적으로 노출하다 보니 포털 사이트를 통해 정보를 얻는 많은 네티즌이 덩달아 선정적인 이슈에 주목하게 되고, 해당 정보가 담긴 페이지의 댓글에는 비판보다는 비난만이 난무하는 환경이 조성되는 것이다.    ▲ 책에 실린 '처형당하는 베트콩 포로' 사진 (미국 사진작가 애덤스, 1968)   ⓒ1968 애디 애덤스 ‘인기 검색어’ 순위는 네티즌이 가장 많이 열람한 자료의 통계이면서 동시에 포털 자신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부메랑 효과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여성 연예인 누드 열풍을 부추긴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는 스포츠연예신문과, 이들 기사들을 주요 콘텐츠로 즐겨 활용하는 포털들이 한결 같이 이승연씨를 성토하며 인터넷 여론 재판의 심판대에 배심원으로 등장한 것은 실로 어이없는 광경이다. 타블로이드판 신문들과 24시간 하루종일 방송되는 헤드라인뉴스의 케케묵기 그지없는 지침을 보자면 다음과 같다. “피가 흐르면 앞쪽에 실어라” ( 같은책, 39쪽 ) 베트남전 이래로, 발생할 때마다 곧바로 필름에 담겨지게 된 각종 전투와 대량 학살은 정기적으로 끊임없이 흘러 들어올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작은 화면으로 즐길 수 있는 오락거리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 같은책, 43쪽 ) 매체의 선정성 뒤에 숨어 있는 폭력성과 잔인함을 보라. 오락거리로서의 강도얼짱, 왕따동영상을. 사회자 없는 온라인 토론의 맹점 인터넷 여론 재판이 가장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는 곳은 각 언론사 홈페이지와 포털 사이트의 토론방이다. 온라인 토론방의 가장 큰 취약점은 대립하는 양쪽의 의견을 조율할 만한 장치가 없다는 점이다. 토론의 자율성을 저해해서는 안되지만 진정으로 토론의 장이 되기 위해서는 이런 장치가 꼭 필요하다. 모 언론사 홈페이지의 경우 토론방에 간접적으로 ‘사회자’ 기능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시도이긴 하지만 활용도면에서는 아직 미흡한 수준이다. 사실 확인 없이 ‘~카더라’ 수준의 기사를 양산하는 기자들과 언론 매체가 일단 문제이겠지만, 그건 네티즌이 스스로 비판적인 시각으로 걸러낼 수 있는 문제라고 봐 준다고 하면, 최소한 자체 운영하는 토론방만이라도 전문적인 토론 운영자를 배치하여 토론방이 어떤 사안이나 사람에 대한 공개 처형장이 아닌 진정한 토론의 장이 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할 것이다. 정상적인 미디어 기능에 대해 앞서 제기한 비판들에 대해 포털은, ‘우리도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다’라고 말하고, 비판이 잦아들면 ‘우리도 미디어이다.’ 라고 설쳐댄다. 인터넷 여론 재판의 범주에 안티 문화를 포함하지 않을 수 없다. 개별 사안들에 대해 각각의 안티 사이트나 페이지가 있고 그들의 건강한 비판 정신에 박수를 보내기도 한다. 이에 대해선 구구한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다양한 모습의 안티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공간인 디지털카메라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를 살펴보자. 이곳의 절대 명제는 ‘재미’다. 재미있는 것, 그러니까 주목 받는 게시물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패러디 저작물이 만들어진다. ‘안티’ 는 재미 생산의 주요 모티브가 된다. 음악성 낮은 가수를 비판하고, 완성도 낮은 영화를 비판하며, 한심한 정치인의 행태를 비판한다. 하지만 재미를 배가하기 위해서라면, 패러디 정신(비판 정신)은 어느새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고, 다른 이의 시선을 좀 더 끌기 위해 악덕의 요소와도 기꺼이 결합하기 일쑤다. 딸녀, 광녀, 핥녀의 경우를 돌아 보라. 누군가 이런 행태에 대해 비판한다면? ‘즐’ 또는 ‘KIN' 이라고 말하면 그만이다. ‘당신이 틀렸다. 왜냐구? 짜증나서 말하기도 싫다. 반응하기 귀찮다.’ 는 말이다.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데 더 이상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왜 디시인사이드를 비판하는가. 단지 재미라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엔, 그들이 이미 너무 거대해졌기 때문이며 ‘단지 재미’ 라는 손쉬운 대답 아래 묻혀버리는 타인의 고통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보기 싫은 끔찍한 장면을 볼 때 두 눈을 감아버리는가 하면, 훨씬 더 끔찍한 광경을 보면서 즐거움을 얻기도 하는 존재다. 조르쥬 바타이유는 1905년 중국의 한 죄수가 “백 조각으로 찢겨 죽는 형벌”을 당하던 광경을 찍은 사진 한 장을, 매일 아무 때나 볼 수 있도록 자신의 책상 속에 평생 간직했다고 한다. 사마천의 <사기>는, 미인 달기의 환심을 얻고 그녀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은나라 주왕이 벌인 만행을 기록하고 있다. 달기 한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백성들이 바친 피 같은 세금을 주지육림(酒池肉林)의 대공사에 탕진했고, 죄인들로 하여금 시뻘겋게 달궈진 원통의 구리 막대 위를 걸어가게 하여 결국 끝까지 건너지 못하고 발바닥이 지글지글 타들어가며 숯불 밑으로 추락하면 그제야 달기는 즐거워 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타인의 고통은 연민의 대상임과 동시에 스펙터클한 즐길 거리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고 한 수전 손택의 말은, 달기와 주왕이 벌인 일들이 규모만 다를 뿐, 우리 모두의 의식 속에서 공공연히 저질러지고 있는 행위임을 경고하는 섬뜩한 선언이다. 그가 지적하듯 ‘사진의 폭력은 폭력의 피해자를 사물로 뒤바꿔 버리기 때문에 잘못된 것’ 이다. 소문(텍스트)이 두 눈으로 바라보는 현실(이미지)로 바뀔 때, 인터넷 여론 재판도 이미 다 끝나버린다.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타인으로서의 한 개인에게 가해질 고통이 타인의 사소한 즐거움과 혼재될 때, ‘O양 비디오’ 가 우리나라 중년 남성들의 인터넷 활용 능력에 기여했다는 천박한 추론의 기사가 만들어지는 비극도 발생하게 된다. 타인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즐기는 것에 함몰된 인터넷 문화의 일면은 나를 포함한 네티즌 개인이 건너야 할 딜레마다. 웹에도 토끼굴이나 개구멍이 있어 슬쩍 돌아갈 수 있다면 차라리 좋으련만. 둥그런 교수형 밧줄의 배경 그림 위에 ‘죽겠습니다.’ 로 시작하는 시뻘건 글씨의 의류 할인 매장 포스터가 동네 담벼락에 붙었다. 옷을 안사주면 죽겠다는 말인지, 죽이겠다는 말인지. 인터넷 여론 재판에 대한 글을 쓰는 내내 선혈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이 교수대 그림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 소설 한 구절을 읽으며, 우리의 분노에 대해, 그리고 타인의 고통에 대해, 우리의 여론 재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뒷좌석에 있는 동료 무전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미 통신을 단념하고 안테나를 걷어치웠을 것이다. 파비앙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에 대해서 분노를 느끼지 않았다. 그 자신이 양손을 놓기만 하면 당장 그들의 생명은 허무한 먼지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는 양손에 동료와 자신의 무거운 심장을 움켜쥐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깨닫자 그는 갑자기 자기 손이 무서워졌다.' - 생떽쥐베리, <야간비행> /이강룡 기자 (readme@readme.or.kr)

[펌] The Way Things Go

2003. 4. 21. 11:36 | Posted by 속눈썹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