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실행만으로「치명적 결함」발생 |
Robert Lemos | 참여 |
2004/08/09 |
executable file이나 macro file만 위험하다고 생각했는 데,
decoding library에 결함이 있으면 data file도 문제가 될 수 있군.;;a
이미지 실행만으로「치명적 결함」발생 |
Robert Lemos | 참여 |
2004/08/09 |
윈도우에 숨어 있는「VMS 기술 유전자」 |
안윤호 (아마추어 커널 해커) |
2004/08/30 |
"윈도우 NT의 핵심 개발 인력들은 VMS에 관계했을 뿐만 아니라 VMS 개발자인 커틀러와도 같이 일한 적이 있다. 윈도우 NT 기술은 VMS와 막연하게 비슷할 것이라는 추측을 넘어 놀랄 만큼 흡사하다."(Russinovich) 아폴로 11호가 처음 달에 착륙했을 때 아폴로 계획의 총 책임자이던 베르너 폰 브라운 박사는 일약 영웅으로 부각됐다. 브라운 박사는 2차 대전 당시 런坪?공습하던 V2 로켓의 책임자이기도 했다. V2의 V는 ‘Vergeltungswaffe’라는 의미의 독일어로 ‘진보된 무기’를 뜻한다. 미국의 맨해튼 프로젝트의 목표가 핵무기의 개발이었다면, 독일은 로켓으로 적국을 초토화하는 것이 목표였다. 달에 착륙한 아폴로의 아키텍트는 런던에 수백 킬로미터 짜리 미사일을 퍼붓던 V2의 개발자와 같은 사람이었다. 독일이 전쟁에 패하자 미군은 서둘러 로켓연구소의 연구진들을 미국으로 데려왔으며 이들은 미국의 우주계획과 대륙간 탄도탄의 개발 초기 단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미국은 실제로 로켓 추진기를 만들 능력이 없었다. 당시는 냉전의 초기 상황으로 개발진들의 과거가 어떠했건 이들의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초기의 대륙간 탄도탄은 V2 로켓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몇 개를 묶어서 추진했고, 1950년대가 되어서야 독자적인 로켓 추진기를 갖출 수 있게 됐다. 독일의 V2 역시 전쟁의 광기가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인재와 자원의 총결집으로 전쟁의 광풍 속에서 갑작스러운 V2의 설계가 가능했다. 당시의 기술로서는 그만큼 로켓의 설계라는 일이 어려운 작업이었다. 로켓을 만들 수 있는 인재의 풀 역시 한정되어 있었다. 소련에 끌려간 독일의 로켓 기술자들 역시 소련의 우주계획과 탄도탄 계획에 동원됐다. 소련 역시 이들의 기술적 유전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V2는 실험적인 로켓이 아니라 전쟁에 배치되어 도시를 폭격하기 위한 무기로, 수백 Kg의 폭탄을 싣고 대기권까지 올라가서 사용하는 실용적인 로켓이었다. 역사적으로 오늘날의 모든 액체 추진 로켓은 V2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다. 기술에도 일종의 유전자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로켓의 유전자, 운영체제의 유전자 로켓이나 핵무기와는 다르지만 컴퓨터의 역사에서 운영체제는, 특히 일정 규모 이상의 운영체제는 만들 수 있는 사람이 극히 제한되어 있으며 한번 성공적으로 개발된 운영체제의 유전자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운영체제 말고도 수많은 운영체제가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으며, 일부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곤 했으나 오늘날 그 운영체제의 후손이나 사용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요즘에도 마이크로 커널이나 진보적인 개념의 실험적인 운영체제들이 많이 있으나 이들 중 앞으로도 살아남을 운영체제는 1%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경쟁이 치열해지고 체계화될수록 새로이 등장한 운영체제의 생존 가능성은 그만큼 낮다고 할 수 있다. 초기의 구현 개념 설정부터 실제 구현까지는 기술적으로 성공적이라 하더라도 사용자 층의 확보라든가 기술의 지속적인 발전에는 개발회사의 규모나 명성 같은 것이 필요하며 기술적인 전통도 필요하다. 개발자와 함께 기술적 전통이 지속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또 운영체제는 적어도 일정기간 동안 사용자들의 요구와 비판을 수용하며 살아남을 수 있는 일종의 영속성(persistancy)이 필요하다. 이들을 생물체에 비교한다면 하나의 기술적 유전자의 보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처음에 IBM의 후광을 입어 등장한 MS-DOS가 마지막 버전까지도 개리 킬달의 CP/M 유전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처럼 NT와 윈도우의 후손들 역시 선조들인 DEC와 매킨토시의 유전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MS는 원래부터 운영체제가 없었기 때문에 모든 기술적 유전자를 외부에서 들여와야 했다. 오늘날 유닉스는 30년 이상의 생존성을, 지금도 간혹 쓰이는 MS-DOS는 초기의 CP/M부터 고려한다면 역시 30년 이상의 운용 경험을, 그리고 윈도우 NT 역시 VMS부터 고려한다면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만약 아무리 개념적으로 좋은 운영체제가 있어도 초기부터 사용자 층이 너무 엷거나 한정된 수의 특수한 기계에서만 구동된다면 이런 장구한 세월 동안 개선되고 유지?발전이 지속되어야 하는 당위성을 갖기가 힘들다. 아니면 운이 좋아 초창기부터 사용되어 왔던가(리눅스 역시 유닉스의 클론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만약 전혀 새로운 운영체제였다면 몇 사람의 관심으로 끝나고 말았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반대로 생각하면 한 운영체제가 널리 쓰이기만 한다면 최선의 성능이 아니더라도 그 존재의 당연함과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지루한 업그레이드와 변경에 대한 당연한 존재이유를 확보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MS의 운영체제들이 그러한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용자들은 80년도부터 지금까지 도스와 윈도우의 버전업을 몇 십 번 이상 반복해왔다. 데스크탑 운영체제의 거의 전부와 서버 운영체제에서 상당한 부분이 이미 MS로 기울어졌다. 컴퓨터의 성능이 좋아진 것도 하나의 이유겠지만 MS의 제품을 사용해도 다른 회사나 단체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커다란 재앙은 일어나지 않았고 이른바 커널 패닉 상태인 ‘공포의 블루스크린’이 보여도 운영자가 리셋을 눌러주면 그만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절대 다수라는, 또는 오랫동안 익숙하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최고의 마케팅을 구사하고 있는 MS의 서버 운영체제는 오늘날 NT가 근간이다. 흔하니까 더 많이 쓰게 되는 점유의 포지티브 피드백은 NT가 우수하다기보다는 일상적인 용도에 NT가 크게 부적합하진 않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인터넷 서버나 적당한 규모의 데이터베이스(MS에 따르면 커다란 데이터베이스나 애플리케이션도 수행 가능하다고 한다)에는 별 문제 없이 사용이 가능하다는 것이며, 비슷한 규모에서는 다른 운영체제가 절대적인 성능상의 우위를 점하지 않고 있다는 가정도 아마 맞을 것이다. 보안 취약성 문제가 일어날 때마다 보안 패치를 적용하거나 알려져 있는 보안상의 결함들을 그때그때 패치로 때울 수 있는 것도 워낙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수라는 조건은 경쟁자에게는 무서운 장벽이기도 하다. 요즘 사용하는 윈도우 XP나 2000은 윈도우 NT에 기반한 기술이다. NT는 80년대부터 개발됐다. NT는 MS의 입장에서 보면 보물이자 당분간 운영체제 시장을 지배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NT의 성공은 기술적이라기보다는 마케팅과 시장점유율의 승리하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NT는 1988년부터 개발되어 1993년 버전 3.1이 발표됐다. 너무나 짧은 시기에 성공적인 시장 점령을 마친 NT는 사실 ‘NT(New Technology)’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긴 개발 역사를 숨기고 있었다. NT는 역사적으로 보면 70년대부터 개발됐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70년대부터 유닉스와 경쟁하던 VMS가 NT의 조상인데, 유닉스와 NT는 시작부터 다른 운명을 타고 태어났다. 그리고 두 운영체제는 16비트, 32비트 그리고 이제 64비트 시장에서도 경쟁을 해야 하는 30년간의 맞수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둘 다 대기업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출발부터가 매우 달랐다. 유닉스의 개발 동기가 취미활동에 가까운 켄 톰슨과 리치의 작업이었다면 NT의 조상인 VMS는 처음부터 32비트 시장을 바라보고 만든 제품이었다. 그 개발은 DEC(Digital Equipment Corporation, 그냥 디지털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라는 대단한 회사로부터 시작됐다(DEC와 그 창업자인 올슨을 다룬 책도 있다. 책의 제목은 『The Ultimate Entrepreneur: The Story of Ken Olsen and Digital Equipment Corporation』) 미니 컴퓨터 기술의 인큐베이터, DEC DEC에 대해 알파칩과 알타비스타(altavista.com)를 만든 회사 정도로만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DEC는 정말 탁월한 회사였다. DEC의 창시자 켄 올슨은 컴퓨터 업계의 영웅이었다. 빌 게이츠 역시 어린 시절 켄 올슨을 자신의 영웅으로 여겼을 정도로 컴퓨터 업계에 대한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흔히 ‘디지털(Digital)’로 불리는 DEC는 사실상 모든 마이크로 컴퓨터와 미니 컴퓨터의 기술 유전자 내지는 인큐베이터 역할을 했다. 1957년부터 1997년까지 40년간 존속하며 수없이 많은 영향을 주었다. 초기의 MS를 포함해 컴퓨터에 관여한 사람들은 예외 없이 DEC의 PDP 시리즈 컴퓨터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유닉스 역시 PDP 시리즈에서 개발됐다. 유닉스의 32비트화도 PDP가 32비트의 가능성을 열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모든 임베디드 컴퓨터 컨트롤러의 시작도 DEC에서 비롯됐다. 마이크로프로세서의 탄생 자체가 PDP-8에서 영감을 얻은 인텔의 엔지니어 테드 호프의 설계로부터 시작됐다. 1957년 MIT의 링컨연구소의 TX-2 프로젝트에 염증을 느낀 켄 올슨은 자신의 동료와 함께 DEC를 설립했다. TX-2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개념인 트랜지스터를 사용한 대형 컴퓨터였다. 올슨이 TX-2에 사용되던 모듈들을 모아서 연구실에 필요한 컴퓨터를 셋팅하는 것으로 출발한 작업은 1961년 PDP-1이라는 제품을 출시하면서 ‘미니 컴퓨터’의 세계를 열었다. 이 제품을 가장 먼저 구입한 회사는 BBN(www.bbn.com)으로 PDP-1을 이용하여 Interrupt Priority Controller를 만들었다. 요즘 하드웨어의 기준으로 보면 황당한 일이겠지만 당시의 기계는 트랜지스터 모듈을 프린트 기판에 조립한 것으로 레지스터 값들은 작은 콘솔에 있는 림프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CPU라는 개념이 하나의 칩이 아니라 ALU와 레지스터 모듈들을 전선(버스)으로 묶어 놓은 형태였다. 당연히 콘솔에 있는 스위치들을 눌러서 레지스터 값을 바꾼 후 시스템을 재가동할 수도 있었다. 운영 요원이 디버거인 셈이었다. IBM을 포함한 다른 업체들이 초고가의 대형 컴퓨터들을 만들었다면 저렴하며 성능이 나쁘지 않은 DEC의 컴퓨터는 예측하지 못한 다양한 수요를 창출하게 됐다. DEC는 여러 가지 컴퓨터를 만들었으나 초기의 성공적인 제품은 1964년의 PDP-8이었으며 12비트 컴퓨터였다. 가격은 1만 2000달러로 당시로서는 매우 저렴한 편이었다. 이 컴퓨터가 나오자 사람들이 컴퓨터를 이용한 작업들을 과감하게 이것저것 시도해볼 수 있었다고 한다. PDP-8은 명령어가 적었고 메모리 보호가 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PDP-8로 그전에는 불가능했던 여러 가지 일들을 할 수 있었다. 그 다음에 나온 PDP-11은 시장을 석권했다. PDP-8보다 크게 복잡하지는 않았으나 DEC가 집적회로의 개발에 신경을 쓴 관계로 이 작은 시스템은 요즘의 PC보다 조금 큰 정도였다. PDP에서는 RTSS와 유닉스를 포함해 다양한 운영체제가 수행되었으며,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컴퓨터 학계의 표준 시스템이나 마찬가지였다. PDP-10 시리즈 컴퓨터는 전산센터용으로 개발되었고 36비트 아키텍처를 가지고 있었다. PDP-10은 AI나 LISP 개발에도 널리 사용됐다. 당시의 DEC에는 Gordon Bell이나 Allen Newell 같은 쟁쟁한 사람들이 근무했다. 사람들은 단순한 구조의 PDP-8을 너무나 좋아했고 PDP-8에 집착했다. 사진에 나오는 PDP-8의 모양은 최초의 마이크로 컴퓨터인 알테어 8800과 너무나 닮았다. 인텔의 마이크로 컴퓨터가 나왔을 때 어떤 사람들은 “PDP-8 wanna be”라며 환영했다. PDP-8이 이렇게 변했으면 하던 바램이 칩으로 탄생한 것이다, 인텔의 초기 4비트와 8비트 프로세서는 PDP-8의 애호가였던 테드 호프가 설계한 것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초기부터 8비트의 마이크로프로세서가 빠르게 수요자층 을 넓할 수 있던 이유 중에는 개발자들이 미니 컴퓨터에서 이미 충분한 경험 곡선을 갖고 잇던 이유도 있었다. 결코 하루 아침에 컴퓨터의 대가들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VMS와 유닉스의 대결 1976년이 되자 DEC는 점차 고성능의 컴퓨터(super-mini라고 한다)로 이행하기로 하고 1978년 VAX 11/780을 발표했다. DEC는 VAX로 미니 컴퓨터의 시장을 장악하게 되었으나 하위 기종에서는 점차 점유율이 떨어지게 되었는데, 마이크로 컴퓨터들과 워크스테이션들이 등장하면서 점차 DEC의 시장점유율이 떨어진 것이다. DEC는 PDP-10의 후속 기종이나 다른 모델을 포기하고 점차 VAX를 주 기종으로 밀게 됐다. VAX의 운영체제로는 VMS와 유닉스가 있었고, 당연히 DEC에서는 유닉스보다 VMS가 훨씬 좋은 운영체제라고 평가했다. 사용자들이 유닉스를 사용하는 것에도 공공연히 반대했던 켄 올슨은 주저없이 유닉스를 ‘엉터리(snake oil)’라고 혹평했다고 한다(DARPA는 그 전까지 인터넷을 관리하는 데 사용했던 PDP-10이 노후화되었고, DEC가 더 이상 PDP-10 시리즈를 생산하지 않을 것임을 알게 되자 DEC와 접촉하여 VAX/VMS에서 TCP/IP를 구현해 주도록 요청했으나, 곧바로 거절당한 적이 있다. DEC가 고유의 VMS 운영체제를 변경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래서 인터넷의 구현은 유닉스 쪽으로 넘어가게 됐다. 결국 VAX에서 수행되는 유닉스에서 TCP/IP 스택이 구현됐다). 1980년대 후반이 되자 DEC는 IBM의 뒤를 이어 두 번째로 큰 컴퓨터 회사가 되었는데, 전 세계에 걸쳐 10만 명을 고용하고 있었다, DEC는 당시에는 하드웨어 외에도 거의 모든 분야에 진출해 있었다. DECnet과 같은 독자적인 네트워크 시스템과 파일/프린터 공유 시스템, 수없이 많은 소프트웨어들, 그리고 자체적인 관계형 데이터베이스 시스템도 갖추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잘 만들어진 제품들이었으나 DEC에서만 수행되거나 DEC 중심적으로 만들어진 것들로, 고객들은 점차 다른 서드파티 제품들을 찾게 됐다. 올슨은 잘 만들어진 제품들은 저절로 팔린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32비트 기종의 시장에서도 RISC들과 386 같은 경쟁자들이 나타나면서 상황은 점차 악화됐다. 1990년대 초가 되자 매출이 급격히 떨어졌고 DEC는 최초로 감원에 들어갔다. DEC는 하나의 대책으로 그 전까지의 CISC 구조인 VAX의 구조를 버리고 64비트 RISC 아키텍처인 ‘알파’ 프로세서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알파는 1990년대 말까지 가장 빠른 CPU로, VMS와 유닉스를 수행할 수 있었으며 MS의 윈도우 NT도 실행할 수 있었다. DEC는 Open VMS라는 새로운 VMS 개념의 제품으로 유닉스 업계와 경쟁하는 한편 자체적인 유닉스 시스템(나중에 OSF/1에서 True 64라는 이름으로 바뀌는)도 출시했다. 광고에도 점차 집착하게 됐다. 어찌된 일인지 이미 시장이 형성된 (그리고 과당경쟁에 돌입한) 유닉스로부터 점유율을 뺏어 올 수도 없었고, NT가 점유하는 저급 서버 시장에서도 실패했다. DEC의 모든 서버 제품들은 그 이전의 PDP 시절처럼 시장을 점유하지 못했다. 올슨은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고 로버트 파머가 CEO로 영입되었으나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적자가 계속되어 대량의 감원이 계속되었고 일부 제품은 오라클로, 어떤 프로세서(예를 들어 Strong Arm 같은)들은 인텔로 팔려나갔다. 결국 1998년 12월 DEC는 컴팩에 매각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컴팩은 다시 0000년 HP에 합병됐다. DEC가 미니 컴퓨터 회사로 출발하면서 40년간 지속되는 동안 대형 컴퓨터들이 사람들에게 해줄 수 없는 많은 영향력과 업적들이 추구됐다. ASCII 문자 셋은 DEC에서 개발된 것이며, ISO-8859와 유니코드(unicode)는 DEC의 다국적 문자 셋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사실 DEC의 기기들은 컴퓨터 개발에 있어 하나의 요람이었다. 또한 대형 컴퓨터와 마이크로 컴퓨터의 사이를 잇는 교량이었다. PDP 기종에서 수없이 많은 프로그래머가 교육을 받았고, 또 많은 애플리케이션과 시스템들이 PDP에서 개발됐다. PDP 시리즈가 존속되는 동안 초기의 모든 마이크로 컴퓨터 개발자들이 DEC를 모태로, 또는 DEC에서 수행되는 프로그램에서 영감을 얻어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곤 했다. 미니 컴퓨터에서 8080을 에뮬레이트하는 작업들도 PDP 상에서 이루어진 것이 많았다. 유닉스 역시 PDP에서 개발되었고 최초의 C 언어도 PDP에서 태어났다. 초기 마이크로 컴퓨터 개발자의 요람인 홈브루 컴퓨터 클럽(atari, apple, osborne 그리고 doctor dobb‘s journal 등이 이 클럽에서 탄생했다)의 구성원들 역시 PDP-8과 PDP-11의 신세를 졌으며, 나중에 이들은 마이크로 컴퓨터 시대를 여는 주역이 됐다. VMS에서 NT로! David A.Solomon과 함께 『Inside Microsoft Windows 2000(3판, Microsoft Press)』이라는 책을 쓴 Mark Russinovich는 그의 컬럼에서 윈도우 NT와 VMS에 대해 자세히 적은 적이 있다. 상당히 유명한 컬럼이라 필자도 몇 번씩 재미있게 읽었고 이전의 유닉스의 역사에서도 소개한 적이 있다. 컬럼에서 Mark Russinovich는 NT와 VMS의 유사성을 심도 있게 다루었다. 보다 초기의 자료인 1993년 『Inside Windows NT』의 서문에서는 NT의 주 개발자인 데이비드 커틀러가 VMS와의 유사성에 대해 적은 바 있다. CP/M이 QDOS를 통해 표절에 가까운 클론의 형태로 MS-DOS로 구현됐다면 NT는 VMS의 개발팀을 통째로 스카웃하여 몇 년 동안에 윈도우의 API를 입혀놓은 형태이다. 기술의 유전자는 이러한 방법으로 DEC에서 MS로 넘어가게 됐다. VMS를 개발한 사람은 데이비드 커틀러(David Cutler)로, 1942년생이며 현재 MS의 Distnuished Engineer로 근무하고 있다. 비교적 일찍 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며 묘한 유머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전해진다. 일설에 의하면 커틀러의 에러 메시지는 언제나 두 가지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단어를 갖고 장난치는 일에도 대가였다. 이를테면 WNT(Windows NT)라는 이름은 커틀러가 지었는데 VMS에서 한 글자씩 뒤로 옮긴 이름이라는 식이다. 또 HAL(Hardware Abstraction Layer)은 IBM에서 한 글자씩 앞당겨서 만들었다고 하는 전설도 있다. 처음에는 듀퐁에서 컴퓨터 관리를 담당하다가 운영체제에 관심이 생겨서 결국 디지털(DEC)에 근무하게 됐다. 커틀러는 첫 작품으로 RSX-11이라는 운영체제를 만들었다. RSX-11은 주로 공장자동화와 산업에 쓰인 운영체제로 DEC의 PDP-11을 위한 운영체제였다. 회사의 기술 담당 부사장이던 고든 벨은 1975년이 되자 32비트 프로세서가 있어야 다른 회사들과 경쟁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32비트 프로세서를 개발하기 시작했고, 이 프로세서는 나중에 VAX로 발전했다. 회사 내에서 RSX-11로 유명해진 커틀러는 이 32비트 프로세서를 개발하는 초기 구성원으로 합류했다. 얼마 후 Dick Hustvedt와 Peter Lipman과 함께 새로운 VAX를 위한 운영체제인 VMS를 개발하게 됐다. DEC에서 결정한 VAX와 VMS의 설계는 약간 특이한 것으로, 구형 기종과의 호환성을 최대한 살리라는 주문이 내려졌다. 즉 VAX는 과거의 PDP-11과 하위 호환성을 가질 수 있어야 하며, 데스크탑 워크스테이션뿐만 아니라 엔터프라이즈 서버에서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VMS는 RSX-11을 포함한 과거의 운영체제와 호환성을 포함해 다양한 하급 기종에서도 싫ㅇ되어야 한다는 주문이었다. DEC는 VAX와 VMS에 큰 도박을 했는데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DEC에서는 VAX와 VMS의 개발을 ‘betting the business’라고 표현했는데 나중에 MS 역시 NT 5.0의 개발 시점에 ”betting the business”라고 표현했다. DEC에서 MS로 명함 바꾼 커틀러 DEC는 1977년 VAX와 VMS 1.0을 발표하고 1978년 출시했다. 커틀러는 그 다음의 VMS의 개발에도 프로젝트 리더와 핵심 아키텍트로 계속 참여했다. 1981년이 되자 커틀러는 DEC를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DEC는 간판 스타를 잃지 않기 위해 더 200명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를 커틀러에게 지원했다. 커틀러는 연구소를 시애틀로 옮겼다. 이 그룹의 목표는 디지털이 1990년대를 이끌 CPU 구조와 운영체제를 만드는것이었다. DEC에서는 하드웨어 프로젝트를 PRISM으로 운영체제는 MICA라고 불렀다. 1988년이 되자 DEC는 커틀러의 프로젝트를 취소하고 팀원들을 해고했다. 커틀러는 때마침 MS로부터 좋은 제안을 받았기 때문에 DEC를 그만두고 팀원들과 함께 MS로 이적했다. 커틀러의 제안은 20명의 개발자들과 함께 MS로 이적하겠다는 것이었고 이중에는 하드웨어 개발자도 끼어 있었다. MS로서는 커틀러를 영입하는 것이 대단한 일이었으며 이만한 개발자는 흔치 않았다. 빌 게이츠는 유닉스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운영체제의 개발이 회사의 미래에 중요한 사건임을 느꼈다고 했다(MS는 초기에 유닉스의 일종인 XENIX를 만들어 시장에 진입하려 한 적이 있으나 별로 재미를 보지 못했다. 1980년대 초반의 MS가 XENIX를 처음부터 개발한 것도 아니며 AT&T로부터 라이선스한 유닉스의 클론이었다. MS가 유닉스에서 바로 손을 떼면서 XENIX의 판권은 요즘 리눅스를 제소중인 SCO로 넘어갔다). 사실 MS는 32비트에 대한 특별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처음에 VMS의 팀이 MS에 오기는 했으나 이 때의 운영체제 이름은 OS/2 NT였다. MS는 아직 윈도우를 개발하지 못한 채 IBM과 OS/2를 개발하고 있던 상태로, 새로운 운영체제가 OS/2의 뒤를 잇기를 희망했으며 API는 OS/2의 일차적 API를 사용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1990년 MS가 윈도우 3.0 개발에 성공하자 MS의 생각이 바뀌었고 IBM과의 관계도 바뀌었다. OS/2 NT는 6주 만에 ‘윈도우(Windows) NT’로 이름이 바뀌게 됐다. Win32가 NT의 공식적인 API로 바뀌게 된 것이다. MS에서는 3.1에 대한 호환성과 16비트 애플리케이션을 NT에서 그대로 실행할 수 있는 것을 중요한 목표로 잡고 DOS와 OS/2 그리고 POSIX도 부분적으로라도 호환성을 갖도록 만들었다. 1990년부터 1993년까지 커틀러의 팀은 NT를 완성하기 위해 거의 광적으로 매달렸다. NT의 핵심 개발 인력들이 VMS에 관계했으며 커틀러와 같이 일한 적이 있기 때문에 NT가 VMS와 막연하게 비슷할 것이라는 추측을 넘어 NT와 VMS는 놀랄 만큼 비슷하다고 한다. Russinovich에 따르면(Windows NT and VMS: The Rest of the Story) NT 역시 다른 운영체제처럼 유저 모드와 커널 모드로 구성되었으나 POSIX, DOS, OS/2의 층은 커널 모드가 아니라 유저 모드에서 수행된다. 커널이 지원하지 않으면 이들이 export하는 API는 아무 것도 수행되지 않는다. NT의 native API는 유저 모드의 애플리케이션들이 커널과 소통하는 것을 규정하는 API지만 많은 부분이 문서화되어 있지 않았다. 운영체제는 이들 어플리케이션 관점에서의 요구를 적절히 처리한다. 너무나 닮은 VMS와 NT NT의 커널이 디지털의 커널을 그대로 카피했다는 평을 받을까 염려되어 NTFS나 새로운 Win32 API 같은 여러 가지 부분을 새로 개발함으로써 이러한 사실을 희석하려 했으나 NT는 VMS 코어의 개작이라는 의혹이 계속 뒤따랐다. 내부적으로 NT와 VMS의 커널이 너무나 비슷했기 때문에 DEC의 엔지니어들은 몇 주도 되지 않아 이들의 유사성을 파악할 수 있었다고 한다. VMS 5.0과 초기 NT는 너무나 비슷했다. 우선 프로세스 구조가 같았다. 프로세스의 우선순위가 둘 다 32레벨이며 상위 16레벨은 시스템에서 고정되어 있었고, 이들의 처리 방식도 같았다. VMS와 NT 3.1과의 프로세스 구조에서 큰 차이라면 NT가 쓰레드를 지원하는 것이었으며 스케줄러가 프로세스가 아닌 쓰레드에 실행 시간을 할당하는 것이었는데, 디지털도 얼마 후인 1995년에는 VMS 7.0에서 같은 방식으로 커널 쓰레드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NT 4.0에서는 유저 쓰레드를 구현했는데 이는 VMS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물론 프로세스 매니저도 비슷했으며 메모리 관리자도 구조가 유사했다. I/O에 이르러서는 상당히 비슷해서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오브젝트 매니저마저도 비슷했다. 앞에서 소개한 컬럼에 따르면 이들의 유사성은 책을 한 권 쓸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NT가 VMS와 심각할 정도로 유사하다는 것을 DEC의 엔지니어들이 알아차리고 상급자에게 보고했을 때 DEC에서는 MS를 제소하지 않았다. 대신 1995년이 되자 DEC는 Open VMS라는 프로그램을 들고 나왔고, 이 제품은 NT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이었다. 뿐만 아니라 DEC는 알파칩에 대한 NT 지원을 약속하기까지 했다. MS는 DEC에 1억 달러 가량을 지불했다고 한다. 그 후로도 몇 년 동안 VMS는 NT를, NT는 VMS의 개념을 차용했다. 얼마 후 DEC는 컴팩에 흡수되었고 그 후로 알파칩과 VMS는 그 전처럼 메인스트림으로 존재하지 못했다. 1980년대 중반까지도 DEC는 MS보다 훨씬 큰 회사였다.
미니 컴퓨터를 발전시킨 대단한 안목과 기술에도 불구하고 DEC는 마이크로 컴퓨터 시대에 잘 대응하지 못했다는 평을 받았다. 초기의 마이크로 컴퓨터를 이용한 PC 시장을 무시했다. 퍼스널 컴퓨터가 시장이 커져 가자 LSI-11이라는 PDP-11 호환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만들어 시장에 뛰어 들었으나 적극적으로 밀어붙이지 않았다. LSI -11과 당시의 주종인 8080 또는 Z80은 비교할 수 없는 성능이었다(80286에 버금가는 성능이다). LSI-11이 자리를 잡으면 DEC의 방대한 소프트웨어들이 시장에 나올 수도 있었다. DEC는 또 VMS가 인터넷의 중추적 OS가 될 수 있는 기회 역시 거부하였다. 결국 유닉스에서 TCP/IP가 구현되었고, 유닉스의 빈약한 통신 기반을 확충할 기회를 주었다(유닉스는 그 이전까지 네트워크 부분이 매우 취약했다). 그 이후로 워크스테이션의 중요한 부분을 인터넷이 가능한 유닉스에게 내어 주었다. 결국 'Betting the Business'에 성공한 팀은 MS가 됐다. DEC에서 VAX와 VMS를 기획했던 전설적인 엔지니어 고든 벨과 데이비드 커틀러는 현재 MS 소속의 연구원이다. 운영체제 교과서에서는 항상 다루던 VMS가 어느 날인가 부터 사라지고 대신 NT가 등장했다. 나중에 데이비드 커틀러는 한 사람이 성공적인 운영체제를 개발하는 것도 큰 행운인데, 자신은 여러 번 성공적인 운영체제 개발에 참여할 수 있었던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고 언급했다. 새로운 기술, 새로운 유전자 합당한 제품에 대한 끊임없는 투자와 개발 노력은 매우 중요하다. 사실 88년 MS의 32비트로의 이행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으며, 자신들의 힘으로 도저히 개발할 수 없는 경우에 다른 유전자를 가져오는 것이 정말 중요한 개발 방법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여 주었다. 만약 VMS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NT가 없었으면 MS로서는 운영체제를 처음부터 개발하며 유닉스와 대결을 벌여야 했을 것이고 어쩌면 오늘날의 서버 시장 지배는 없을 것이다. 정말로 MS는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다(빌 게이츠가 말했다고 전해지는 “IT 업계에서 6개월은 영겁이다”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우연하게도 NT가 발매될 시점에 유닉스 업계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소모적인 경쟁을 벌일 때였고 가격도 인하하지 않은 상태였다. NT는 대대적인 홍보와 함께 유닉스들에 비해 저렴한 가격으로 시장을 파고들었다. 아직 리눅스나 FreeBSD 같은 공개형 유닉스 운영체제는 별로 홍보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NT로서는 다행한 일이었다. 새로운 기술의 개발에는 돈뿐만 아니라 시간이 엄청나게 들기 때문에 업체들은 개발에 전념하든가 아니면 기술 유전자를 찾아 새로운 피를 수혈해야 한다. 기술을 개발하는 도중에 다른 업체들이 비슷한 기술을 만들어낼 수도 있기 때문에 자신의 기술 유전자를 보호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IT 기업들의 행태는 역사적으로 그들의 성장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다른 기술 유전자를 수혈받았는가를 완전히 망각한 처사라고 볼 수도 있다. 2004년 2월 18일자 뉴스위크에는 스티븐 레비가 빌 게이츠를 인터뷰하는 내용이 나온다. 인터뷰에서 빌 게이츠는 컴퓨터 기술이 기로에 처해 있다고 보고 있지만 잠재적인 영향력은 그 어느 때보다 커졌다고 확신했다. 소프트웨어의 점진적 진보와 비약적 진보에 대해 설명하면서 비약적인 진보라는 것은 “이제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느끼는 것들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비약적인 진보는 업체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그것이 없으면 돈을 벌 수 없다. 소비자가 일단 소프트웨어를 구입하면 새로운 제품이 나오지 않는 이상 다시 구입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약 지금 진보가 없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진보가 느린 것이 아니라 90년대의 IT 거품이 너무나 컸으며 그것은 바로 인터넷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인터넷이 팽창하던 90년대에 MS는 다른 경쟁업체들을 압도하는 대도약을 했고 그 주력이 바로 윈도우와 NT였다. 그리고 NT는 다른 회사의, 그것도 주력 운영체제였던 VMS의 재구현(re-implementation)일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제기되긴 했으나 정작 당사자인 DEC가 조용히 있었기 때문에 별로 문제를 일으킨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윈도우가 룩앤필(look and feel)을 놓고 애플과 사투를 벌인 것에 비하면 정말 운이 좋았다고 볼 수도 있다. 인터뷰에서 빌 게이츠는 매년 69억 달러를 쓰면서 앞으로의 새로운 목표인 기계와 기계, 그리고 사람과 기계의 ‘경계(boundary)’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도전하고 있다고 했다. 만약 그 성과로 비약적 진보가 일어나지 않으면 주주들에게 사과해야 하며, 반대로 이런 기술들이 개발된다면 사용자들에게는 커다란 혜택이 주어지 것이라고 했다. 69억 달러의 개발비는 기술적 도약을 위해 위험을 감수한 MS의 노력의 징표라는 것이다. MS의 다음 유전자는? 개발비를 떠나서 MS는 어떤 새로운 유전자를 내어놓을 것인가? 과연 MS 고유의 중요한 무언가가 나와서 세상을 뒤흔들어 놓을 수 있을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사용자뿐 아니라 주주들도 정말 좋아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노력의 징표를 다른 회사들같이 쉽게 내어주지는 않을 것이고 보면 경쟁자들과의 거리는 더욱 멀어질 것이다. 어찌보면 세상은 공평하지 않은 것이다. 필자는 새로운 기술 유전자는 어디에서 나올까 진작부터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만약 세상을 정글에 비유한다면 너무나 경쟁이 치열하고 혹독하며 감시가 심한 곳이라 작은 싹들은 초장에 잘려나가기가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의 법칙을 따라서 어디에서인가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싹들이 나오고 이 싹들이 크면서 새로운 문화와 기술의 유전자를 만들 것이다. @ |
http://www.zdnet.co.kr/news/column/hotissue/0,39024748,39129985,0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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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만 있으면 회사가 시장에서 실패할 수는 있어도
엔지니어는 가진 기술을 들고 다른 회사로 옮겨가면 되는 듯..
회사의 성공이 엔지니어의 성공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닌 것처럼
회사에 실패해도 엔지니어는 성공할 수 있다는..
美 대선「굴뚝산업은 부시, IT는 케리 지지」 |
정치헌금 기여도 분석 결과 |
남정호 기자 (joins.com) |
2004/09/01 |
'이번 미 대선에선 누구를 밀 것인가'. 미 산업계가 이를 두고 나뉘고 있다. 미국의 정치자금 감시를 위한 시민단체인 '책임정치 센터'가 정치헌금 기여도를 분석해 내린 결론이다. 이에 따르면 미국의 에너지, 자동차, 방위산업 등 중공업 계통은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후원금을 많이 냈다. 반면 첨단산업과 매스컴계의 저명 인사들은 민주당 존 케리 후보에게 후원금을 더 많이 냈다. 이 같은 차이는 어느 후보가 당선되느냐에 따라 각 업계의 명암이 갈리기 때문에 나타난다. 지난달 초의 자료에 따르면 지금까지 부시는 2억2874만달러(2635억여원), 케리는 1억8659만달러(2149억여원)를 모은 것으로 집계됐다. 중공업계는 부시 지지 산업별 정치헌금 중에 공화당에 가는 비율이 ▶ 석유, 가스업은 82% ▶ 육가공업은 80% ▶ 자동차업은 78%인 것으로 나타났다. 철강, 소매, 방위산업 분야의 모든 정치 헌금 중에도 공화당이 차지한 비율은 전체의 60% 이상이었다. 한편 다국적 증권회사 등에서도 공화당에 거액을 쾌척하고 있다. 개별 거액 헌금자로서는 모건스탠리가 55만달러 이상을 내 1위를 차지했고, 금융, 회계회사인 ▶ 메릴린치 ▶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 ▶ UBS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케리, 첨단산업에서 인기 민주당 선거대책본부는 최근 '케리를 지지하는 비즈니스맨 200명'이란 명단을 발표했다. 이는 케리 지지 인사들이 재계에 폭넓게 퍼져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실제로 세계적인 증권투자가인 워런 버핏, 리 아이아코카 전 크라이슬러 회장, 스티브 잡스 전 애플사 회장 등 쟁쟁한 인물들이 포진해 있다. 또 로버트 루빈 전 재무장관, 로라 타이슨 전 클린턴 대통령 경제자문위원장 등 거물 경제관료 출신도 포함돼 있다. 대표적인 IT업체인 MS사는 13만달러를 내 거액 헌금자 10위로 기록됐다. @ |
「구글의 최종 목표는 인공지능 검색」 |
Stefanie Olsen (ZDNet Korea) |
2004/05/12 원문보기 |
구글을 위해 온갖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을 사람을 꼽으라면 크레이그 실버스타인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실버스타인은 구글의 핵심 멤버이자 기술 책임자이며 검색 분야에서 항상 “나쁜 짓은 하지 말라”는 구호를 외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올해 31세인 실버스타인은 1998년에 스탠포드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던 중 서지 브린, 래리 페이지 등 학교 동창들과 함께 근처 차고에서 지금은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검색 엔진을 만들어냈다. 결국 이들의 노력은 성공을 거뒀다. 지금 이 검색 회사는 2000년 이래 IPO를 시행한 IT 업체들 중에서도 가장 큰 인기를 끌고 있으며 조만간 27억달러에 달하는 자금을 끌어모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IPO 시행에 따라 엄청난 부도 챙기게 되겠지만 이와 별도로 실버스타인은 오랫동안 정말 열심히, 그리고 즐기면서 일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구글의 기술 책임자인 그는 검색이라는 비전을 가지고 사용자들이 실제로 정보에 접속하는 것은 도와주는 제품을 개발하는 임무를 수행중이다. 여기에는 구글 웹사이트를 각 개인에 맞춤화하는 새로운 기술과 무선 기기 활용 방안, 가격 비교 기능, 그리고 무료로 이메일을 1GB 용량까지 보내고 저장하고 관리할 수 있는 서비스 - 이것은 G메일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 등이 있다. 구글의 IPO 신청이 있기 이전에 가진 인터뷰에서 실버스타인은 사생활 옹호론자들의 G메일 반대 움직임과 구글의 문화적 변화, 그리고 페이지랭크(PageRank)에 대한 의존도가 변화하고 있는 현상에 대한 문제 등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페이지랭크는 구글이 유명세를 떨치는데 크게 기여한 수학적 알고리즘이다. 최근 구글은 스탠포드 대학의 페이지랭크 라이선스를 2011년까지 연장한 바 있다. 검색 분야의 역사에 있어 구글이 한 역할에 대해 당신은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가? 구글은 사람들이 요구하는 딱 그 시점에 등장했다. 컴퓨터의 출현 이후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은 정보를 가질 수 있게 됐다. 따라서 그 많은 정보들을 유용한 것으로 가공하는 우수한 기술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구글이 그 접점에 있었던 것이다. 당신은 그간 검색 엔진의 이상적인 모습을 스타트랙에 등장하는 스타쉽 엔터프라이즈가 갖고 있는 지적 능력이라든지 똑똑한 검색 애완동물들이 가득한 세상에 비유하곤 했다. 이에 대해 좀더 말해줄 수 있나? 좋다. 스타쉽 엔터프라이즈나 똑똑한 검색 애완동물에 이은 내 세 번째 생각은 컴퓨터가 도서관의 사서처럼 도움을 주는 것이다. 이것 또한 상당히 재미있다. 도서관 사서들은 검색하기 위해 물론 컴퓨터와 구글도 함께 사용하고 있지만 잘 보면 이들은 검색 작업에 컴퓨터만으로는 불가능한 어떤 지적인 요소를 집어넣고 있다. 결국 우리의 목표는 매우 영리한 컴퓨터를 만들어 상호 대화를 할 때 컴퓨터들로 하여금 실질적으로 더 좋은 검색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정보를 잘 활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구글이 검색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항상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다. 설명한 것과 같은 인공지능적인 검색이 언제 가능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인공 지능의 마지막 미개척 분야는 언어 이해라고 본다. 이것이 이뤄진다면 컴퓨터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마치 도서관 사서와 얘기하는 것과 똑같은 경험이 될 것이다. 컴퓨터와 사서는 모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와 우리 자신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 간에는 큰 차이점이 있다. 바로 이 부분이 검색 애완동물이 필요한 지점인데 도서관 사서들은 컴퓨터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감정이나 다른 여러 상상속의 세계에 관한 정보들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언제 가능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보통 200~300년이 걸릴 것이라고 말한다. 아마 300년보다는 더 짧아지지 않을까? 그러나 만약 200년이 걸리다 해도 어차피 나는 그 당시 살아잇지 않을 것이니까 아무도 나에게 뭐라고 말하진 못할 것이다. 정말 멋진 생각이다 좀 더 말해보자. 30년 내에 방금 언급한 것들이 이뤄질 것이라고 상정해보자. 사실 이런 문제들은 지난 60년대에 인공지능을 연구하던 사람들도 모두 생각했던 부분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됐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는 인공지능의 궁극적인 목표인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기엔 아직 까마득한 수준이다. 몇몇 컴퓨터 연구가들은 페이지랭크가 이제 죽었다고 말한다. 인터넷 광고주들이 자사 사이트의 인기도를 허위로 만들어냄으로써 페이지랭크를 악용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인가? 그렇지 않다면 페이지랭크를 어떻게 수정한 것인가, 아니면 이젠 페이지랭크가 그리 큰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인가? 페이지랭크가 죽었다는 주장은 우선 세계를 너무 정적으로 보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페이지랭크는 언제나 순위 매김 방법 중 하나로 유효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우리가 순위를 매기는 방법에 대해 점점 더 새로운 아이디어를 개발해내고 기존 아이디어를 수정하거나 이 모든 것들을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낼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사용하는 이런 모든 기술의 역할도 바뀔 수밖에 없다. 현재 구글에서 페이지링크보다 더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알고리즘 기술이 있다면? 물론 우리는 현재 다른 기술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언급하는 것은 좀 곤란하다. 개괄적으로 말해보자면 우리는 약 2~3가지 종류의 기술을 사용하고 있다. 하나는 인간의 지능을 이해해 그것을 활용하는 종류다. 우리는 사람들이 어떤 한 페이지를 보고 있다가 다른 페이지로 넘어가기로 결정하는 것이라든지 아니면 그 텍스트가 어떤 것이라고 주석을 다는 행위에서 힌트를 찾아내고 있다. 현재 구글은 몇 대의 서버를 운영하고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10만대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만대라고 추산하기도 한다. 몇몇 업계 관계자들은 구글의 컴퓨터 구성이야말로 일급비밀에 속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것만 잘 이용한다면 검색은 단지 한개의 애플리케이션에 불과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G메일 같은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당신네들의 컴퓨터 구성이 바로 구글의 힘이라는 사람들의 평이 정당하다고 보는가? 재밌는 말이다. 검색의 역사는 실제로도 원래 검색을 위해 개발됐다기보다는 애플리케이션에 추가적으로 포함됐던 검색엔진의 역사에 그 궤를 같이 한다. 알타비스타와 같은 경우에도 원래는 알파 서버의 개념 증명(POC) 용도로 DEC에서 개발한 것이다. 구글에는 상업적 웹 검색 엔진 전용으로 1만대 이상의 컴퓨터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물론 검색을 더 잘하기 위해 인프라스트럭처를 개발해온 결과다. 우리는 용이하게 확장시킬 수 있는 그 무언가를 원했다. 웹이 너무나 빨리 성장할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컴퓨터만 추가시키면 코드를 새로 작성하지 않고 그 즉시 용량을 늘릴 수 있도록 확장성이 뛰어난 알고리즘을 개발해야만 했다. 이런 생각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처음 회사를 설립했을 때는 지금보다 수천배나 작았던 것을 오늘날의 크기까지 키울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우리는 이런 기술들이 많은 정보를 찾는 것과 같은 일상적인 업무에 상당히 유용하다는 것도 알게 됐다. G메일이 아주 좋은 예다. 게다가 이와 같은 정보들은 웹 자체만큼이나 클 수도 있으며 아니면 다 합쳤을 때 웹보다 더 클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정보도 다룰 수 있는 기술적 노하우를 갖고 있다. 현재 어떤 다른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고 있는가? 자세히 말할 수는 없다. 일반적인 방향은 이미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다.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좀더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G메일은 사적인 정보를 검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우리 노력의 첫 번째 실제 결과다. 사생활 옹호론자들부터 시작해 지금은 입법자들에 이르기까지 G메일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며 뭘 느꼈는가? 구글이 사람들의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자극을 받는 것도 매우 가치 있다는 점들을 배웠다. 지난번에도 구글이 한 일에 대해 사람들이 흥분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바로 우리가 데자닷컴(Deja.com)으로부터 유즈넷(Usenet) 아카이브를 인수했을 때다. 이를 두고 유즈넷 공동체에서는 모두들 이제 유즈넷의 미래는 어떻게 되느냐면서 정보에 접속하는 문제에 대해 큰 우려를 표시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에 익숙해지자 이들은 제품을 사용해보면서 정말로 좋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사건은 지나갔지만 나는 이번에도 같은 일들이 일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어떤 회사든지 모든 사람들에게 중요한 이슈로 간주되는 것에는 진지하게 임해야 한다. 나는 구글이 그런 회사라고 생각한다. 서비스는 어떻게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어떤 변화가 생길 것이라고 추측하기엔 지금은 너무 이르다. 장기적으로 볼 때 하나의 거대한 검색 공간이 있는 것과 서로 다른 작은 검색 공간들, 그러니까 이 웹사이트에서는 이런 데이터베이스를 그리고 저 회사에서는 이메일 아카이브를 제공하는 식으로 존재하는 것 중 어떤 방식이 더 좋을 것 같은가? 사용자 입장에서는 한 개의 검색 공간을 가지고 싶어 할 것이다. 기술적인 면에서 나는 어느 것이나 상관없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사용자들이 원하는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한 공간에서 검색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또한 그 단일한 검색 공간이 아주 영리해서 전세계 수억만 가지의 다른 정보 소스 중 어떤 결과가 적절한지 알아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검색 기록이나 등록 데이터, 이메일 문서 등을 한 곳에 놓았을 때 사생활 보호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정보를 만들어내고 정보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정보 공개 방식에 대한 결정권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사람들이 구글을 통해 어떤 식으로 자기네 정보를 내보낼지 제어할 수 있도록 모든 종류의 방법을 제공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정책이 될 것이다. 구글의 알고리즘은 확장성이 있는가? 그러니까 예를 들어 당신네의 데이터베이스에 들어있는 데이터가 2배로 늘어나면 검색 결과를 보내주기 위해 단순히 컴퓨터만을 2배로 늘리면 되는 것인가? 우리 알고리즘은 물론 확장된다. 그리고 웹 크기가 2배로 늘어나면 컴퓨팅 기기도 물론 2배로 커져야할 것이다. 기계가 다운되는 특정한 경우가 있는가? 인위적으로 막대한 용량의 데이터를 입력시켜도 크게 상관이 없는가? 내가 아는 한도에서 볼 때 대용량 데이터가 인위적으로 들어와도 잘 돌아간다.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아직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진 않았다. 검색 기능이 진보하려면 운영체제에 내장돼야 하며 MS가 개개인에 더 잘 맞는 툴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그렇게 된다면 구글은 MS가 수집한 정보에 접속하기를 원하는가? 몇 년 전에 있었던 MS와 넷스케이프 간의 논쟁을 생각해보라. 당시에도 운영체제에 어떤 것이 들어가야 하는지, 들어가서는 안되는지 열띤 논쟁이 있었다. 주로 운영체제가 어떤 것이냐 하는 개념 정의에 관한 논쟁이었다. 사실 나에게 이런 것들은 그다지 흥미를 끌지 못한다. 나의 관심사는 사람들이 필요한 정보를 가능하면 가장 쉽게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MS 제품이 2006년도 이전에는 출시되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해보자. MS가 검색 분야에서 이른바 FUD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고 보는가? 그런 일에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MS는 검색이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결론을 내렸고 공개적으로 표명한 적도 있다. 여기엔 우리도 확실하게 동의한다. 동영상이나 오디오 검색 엔진을 만드는데 있어 복잡성은 어느 정도인가? 텍스트가 아닌 정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런 정보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등이 이런 복잡성에 속한다. 어찌 되든 간에 사람이 그것을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쉬운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오디오나 동영상에도 가능은 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학계에서 이 분야에 매우 큰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단기적인 문제점들은 그다지 기술적인 부분이 아니다. 이런 컨텐트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공개를 꺼리고 사람들이 그것을 검색할 수 있도록 내놓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람들의 의견을 존중한다. 언젠가 이런 정보를 웹상에서 검색할 수 있는 좋은 비즈니스 모델이 등장하거나 아무런 불편이 없는 어떤 방법이 나타날 때까지는 이와 관련한 기능을 제공하지 않을 작정이다. 현재 개인 맞춤화 툴들이 등장하고 있다. 아마존의 A9.com과 MSN에서는 각각 다른 기술로 개인화를 구현하고 있다. 구글의 툴은 이를테면 “우리에게 정보를 주면 검색을 도와주겠다”라는 식이다. 반면 다른 회사들은 “당신들의 방법을 배우고 싶다. 그런 이후에 당신을 돕겠다”라는 식이다. 구글의 접근 방식이 어떤 면에서 더 우월한지 설명해 달라. 후자의 경우에는 먼저 배우고 나서 방문자를 돕는다는 주의다. 컴퓨터는 2개의 다른 장소에서 각각 지적인 판단을 내려야한다. 이 방법이 나쁘다거나 전망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방식을 사용하면 컴퓨터에 더 큰 부담을 준다. 컴퓨터에 당신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말하면 컴퓨터는 그 정보를 가지고 당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주는 정도만 수고하면 된다. 이 두가지 방법은 모두 사람들에게 개별적인 정보를 주자는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 다른 것은 단지 어떤 식으로 도달하느냐하는 것뿐이다. 미래에는 이런 검색이 더욱 더 흔해질 것이다. 당신은 구글의 첫번째 직원으로서 구글의 문화가 당신이 처음 시작했을 때와 비교해 어떻게 변했는지 말해줄 수 있는가? 분명히 많이 변했다. 과거에는 회사의 모든 사람들과 알고 지냈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유감스럽다. 그러나 문화는 달라졌어도 구글의 기저를 이루는 기본 원칙들, 그러니까 제품에 있어서나 하나의 회사로서 내부 운영이 어떤 식으로 이뤄지느냐 하는 면에서는 시작할 때와 그다지 달라진 게 없다. 바로 이 점이 아직도 내가 감동하고 있으며 특히 아직도 구글에 있는 이유 중 하나다. 우리는 아직도 작업 분위기가 즐거워야 한다고 믿는다. 내가 처음에 시작했을 때처럼 지금도 이것은 지켜지고 있다. 구글 사무실에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마사지 치료사가 오는데 예전에는 한사람이 왔던 반면 지금은 몇 사람이 한번에 들어와서 마사지를 받고 싶어 하는 직원들에게 마사지를 해준다. 제품 면에서 구글은 매우 기술 중심적인 회사임과 동시에 사용자 경험에 매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물론 한 회사를 운영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인터넷 회사로서 5년 반이라는 세월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이런 저런 힘든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늘 일관성 있게 운영되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 대해 나 자신은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 |
엉뚱한 단어로 바꾸는 이메일 보안 필터링 |
Stefanie Olsen (Special to ZDNet News) |
2002/07/19 원문보기 |
"야후 메일이 '모카(mocha)' 단어에 대해 모종의 조치를 취하고 있다?" |
이런 의문이 드는 이유는 야후의 무료 이메일 서비스 사용자가 '모카'라는 단어를 사용한 메시지를 보낼 때, 전송 과정에서 이상하게도 '에스프레소(espresso)'라는 단어로 바뀌기 때문이다. 야후는 악성 코드로부터 사용자를 보호하기 위해 자바스크립트 코드로 쓰이는 'mocha'같은 일부 단어를 다른 단어로 치환하는 자동 필터를 적용하고 있다. 야후가 이처럼 자동필터를 적용하는 것은 사용자가 HTML 형식(Web enhanced)으로 보낼 때 수신자 PC에서 프로그램을 실행시킬 수 있는 자바스크립트 명령이 이메일에 포함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자바스크립트는 인터넷 언어로, 예를 들어 이를 이용하면 브라우저에서 새창을 띄우게 하거나 암호를 바꿀 수 있는 입력란을 생성시킬 수도 있다. '모카(Mocha)'는 HTML 형식의 이메일에서 실행할 수 있는 특수한 명령 가운데 하나다. 'mocha'를 입력하면 넷스케이프 브라우저의 특정 디스플레이 영역에 화면이 뜨고 명령어를 입력할 수 있는 글자 입력 난이 아래에 생기게 된다. 예를 들어 악의적인 해커가 사용자에게 알리지 않고 암호를 바꿀 수 있는 프로그램 실행 명령어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야후는 이같은 공격으로부터 사용자를 보호하기 위해 주요 명령어를 자동으로 검색해 대치한다. 이는 다른 업체들이 쓰고 있는 방법보다 강화된 것으로 사용자는 이를 눈치채지 못한다. 특정 단어를 검색하고 대치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야후 대변인은 이 기능이 언제부터 시행됐는지 밝히지 않았다. 야후의 필터링이 적용되면 코드 문자열의 값을 구하는데 쓰이는 자바스크립트 명령어인 'eval'라는 단어가 'review'라는 단어로 바뀌게 된다. 따라서 업무상 메일을 HTML 메시지로 보낼 때 'evaluate'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희한하게도 'reviewuate'라는 이상한 단어로 바뀔 수도 있다. 중세풍이란 뜻의 'Medieval' 또한 'Medireview'라는 단어로 바뀐다. 이처럼 엉뚱하게 바뀐 단어는 웹스터 사전에도 나와 있지 않는데도 구글 검색 엔진에서 검색하면 1150건 정도의 결과를 찾을 수 있다. 이를 통해 야후 이메일이 얼마나 많은 단어를 바꿨는지 추측할 수 있다. 야후의 의도는 회원을 혼란스럽게 하거나 이메일 빅브라더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잠재적인 보안 위협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야후의 대변인 메리 오사코는 "야후 사용자를 위한 높은 보안 수준을 유지하려고 잠재적인 크로스 스크립팅 칩입으로부터 사용자를 보호할 수 있는 자동화된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보안 전문가들은 악의적인 해커가 코드를 이용해 사용자 컴퓨터에 침입해 암호를 변경할 수 있기 때문에 야후, 핫메일 같은 웹기반 이메일 서비스에서 HTML 형식에 대해 자바스크립트를 필터링하는 일은 매우 흔한 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야후가 쓰는 방식은 독특하다고 덧붙였다 |
검색엔진의 강력한 음란물 필터링「알고보니 단순무식!?」 |
Declan McCullagh (ZDNet Korea) |
2004/04/26 원문보기 |
PartsExpress.com는 오디오 및 동영상 그리고 스피커 컴포넌트에 있어서 최고의 회사라고 자부하고 있는 업체다. 그런데 아마 구글 검색 엔진의 포르노 사이트 필터링 기능을 즐겨 사용하는 온라인 쇼핑 애용자들은 이 회사에 대해 전혀 모를 것이다. 오하이오 전자 소매업체인 이 회사는 어쩌다가 자기네 회사의 도메인 이름 중에 ‘sex’라는 단어가 들어가게 되었고 이 ‘sex’라는 단어 때문에 구글은 필터링을 통해 이 웹사이트에 대한 접속을 차단해버린다. 물론 이 사이트만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은 아니다. CNET 뉴스닷컴에서 조사해본 결과에 의하면 구글의 세이프서치(SafeSearch) 필터링 기술은 도메인명에 ‘sex’라든지, ‘girls’, ‘porn’과 같은 단어가 들어가기는 하지만 사실은 그런 단어가 연상시키는 내용과는 관련이 없는 웹사이트마저 차단해버린다. 구글의 세이프서치에 포함되어 있는 취약점들은 단순히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아무 죄도 없는 웹사이트 운영자들 입장에서는 자기네 웹사이트가 구글 검색 엔진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돼 심각한 손해를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구글은 인터넷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검색엔진이기 때문에 구글에서 차단되어 목록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면 특히 마케팅 예산이 한정되어 있는 중소 업체의 판매량은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게 된다. 지난 달 검색 회사인 웹사이드스토리(WebSideStory)는 구글에서 주장한 바에 따르면 구글은 검색 점유율이 최고 수준에 올랐으며, 미국내에서는 전체적으로 41%를 기록했고 구글의 시장 점유율은 지금도 꾸준히 상승세를 타고 있다고 발표 한 바 있다. ALittleGirlsBoutique.com을 통해 소녀들을 위한 옷을 취급하는 가족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 마리아 메디나는 "구글에 들어가느냐 못들어 가느냐가 비즈니스를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다. 나는 4명의 자녀를 키우기 위해 여자 아이들의 옷과 액세서리를 판매하는 재택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 이렇게 하면 우리 아이들과 좀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는 비즈니스가 가족들에게 해롭다고 해서 차단하고 있다. 말도 안 된다"라고 말했다. 4년 전에 세이프서치를 만들어낸 구글 엔지니어 매트 컷츠는 자신이 만들어낸 알고리즘에서는 웹페이지 주소에 들어가는 ‘비교적 몇 안 되는’ 키워드를 겨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단어가 나타나면 세이프서치의 알고리즘에서는 차단 목록에 그 주소를 포함시키게 되고 그 사이트의 실제 내용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평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컷츠는 "우리는 정확성과 기억, 그리고 안전을 선택하는 대가로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한다. 세이프서치를 선택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보수적이라는 것에 대해서 별 문제 삼지 않는 사람들이다"라고 말했다. 컷츠는 얼마나 많은 웹 검색이 세이프서치를 통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밝히려 하지 않으면서 구글이 매일 처리하는 수백만 건의 쿼리 중에서 매우 작은 양이라고만 말했다. 하지만 자기네 검색 기술의 우수성과 자기네 직원들 가운데는 컴퓨터 공학 박사들이 세계에서 가장 많다고 자랑하는 구글이 이런 식으로 필터링을 한다는 것은 그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구글은 세이프서치에서 "키워드나 구절을 검사하는 기능을 가진 첨단의 독자적 기술을 사용"하며 "포르노라든지 명백한 성적 내용을 담은" 웹페이지에 대해서만 필터링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인터넷에서 사서들의 인덱스라는 웹사이트를 운영하고 있으며 필터링 소프트웨어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도서관 사서인 캐런 슈나이더는 "그것은 별로 영리하지 못한 일이다"라고 하면서, 세이프서치는 "매우 원시적인 사이버시터와 같은 수준의 툴을 생각나게 한다. 사이버시터는 1990년대에 나왔던 툴로서 전혀 세련된 툴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어이없는 음란 차단에 '선량한 주민'까지 등록 거부 지난 몇 년 동안 웹컨텐트 필터링의 부정확성에 대한 논란은 끊이질 않고 있다. 1996년에 있었던 매우 어처구니 없는 사건으로는 아메리카 온라인에서 만들었던 저속한 단어들을 차단하는 필터링 때문에 영국의 한 마을인 스컨쏘프 주민들의 등록이 완전히 차단당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구글도 역시 스컨쏘프의 뉴스 사이트인 hisIsScunthorpe.co.uk와 고양이 입양 사이트인 ScunthorpeDistrictCatsProtection.co.uk를 차단하는 등 똑같은 실수를 범하고 있다. 도메인명에 'sex'라는 단어 배열이 들어감으로서 문제가 된 사이트에는 ArkansasExtermination.com이 있는데 이 회사는 '흰개미와 해충을 완전 박멸'해준다는 회사다. 이름은 밝히지 않은 이 업체 사장은 구글이 어떤 식으로 분류하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다면서, "우리 형이 이 웹사이트를 만들었다. 나는 잘 모른다"고 말했다. 또한 세이프서치가 어린이들에게 안전하지 못하다고 분류한 웹사이트에는 JewishSussex.com와 매사추세츠 탑스필드의 EssexCountyBeeKeepers.org라는 종교 웹사이트, 그리고 호주의 블루스 밴드가 만든 웹사이트 BluesExcuse.SouthBurnett.com.au와 BassExpert.com, 그리고 앵글로 색슨의 역사 사이트인 RomansInSussex.co.uk 등이 있다. RomansInSussex.co.uk을 디자인한 개럿 롤롭스는 구글 외에 다른 회사들의 필터링에 대해서도 불만을 표시했다. "우리는 다수의 도서관 네트워크와 학교 네트워크 및 인터넷 카페에서도 도메인 명에서 'sex'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차단해버린다는 것을 알게 됐다. RomansInSussex.co.uk의 주 독자층이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기 때문에 문제가 크다"라고 말했다. 영국의 서섹스 고고학 협회와 근처 박물관들의 부탁으로 이 사이트를 디자인한 롤롭스는 "나는 구글이 우리같은 웹사이트를 위해 '화이트 목록'을 만들 수 있으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구글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인 컷츠는 세이프서치 웹페이지로 가면 방문자들이 불평이 있을때는 방문객들이 회사에 연락을 취해주기를 당부했다. 컷츠는, 도메인 명이나 웹 주소 가운에 ‘sex’라는 말이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대부분 sex는 매우 복합적인 내용에서 사용되고 있다. 어떤 필터도 100% 정확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 회사의 필터를 항상 검사하고 어떻게 하면 개선시킬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온라인의 외설과 상스러운 단어를 싫어하는 검색자들을 끌어들이려는 회사는 구글 말고도 많다. 야후에서는 ‘성숙한 웹 컨텐트’라는 검색 필터를 제공하고 있으며 애스크 지브스에서도 아동에게 안전한 검색만을 따로 떼어서 별도의 웹사이트를 구축했다. 그러나 야후의 필터는 구글의 필터만큼 지나치게 까다롭지는 않은 모양이다. 야후 검색에서는 영국의 서섹스나 에섹스, 그리고 스컨쏘프를 찾아볼 수 있다. 1년 전에 이미 검색업계에서는 세이프서치가 너무 지나치다는 내용의 보고서가 출판됐는데도 불구하고 구글에는 계속해서 이런 문제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 하바드 대학의 버크먼 센터에서 2003년 4월에 발표한 보고서에서는 세이프서치에 들어있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일부 뉴스 기사들과 정치적 웹사이트들이 차단됐다고 보고했다. 구글의 비즈니스 개발 부서의 부사장인 데이빗 드러먼드는 세이프서치는 개발되던 당시부터 지나칠 정도로 필터링할 수 있게 설계됐다고 말했다. 드러먼드는 "세이프서치를 켜는 사람들은 어떤 것이 차단되었느냐 하는 것보다는 무엇인가 해로운 것이 몰래 들어오는 것에 대해 훨씬 더 많이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어처구니 없는 차단 기능 CNET 뉴스닷컴에서는 수천 개의 웹페이지를 대상으로 세이프서치에 대한 평가를 수행했으며 어떤 웹페이지들이 포르노로 구분되는지 밝혀냈다. 그 결과는 거의 10년 동안 인터넷 필터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과 똑같은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1996년 분석 작업에 의하면 사이버패트롤이 미 라이플 협회와 동성애자들의 웹이트들을 차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사이버시터는 alt.feminism이나 soc.support.fat-acceptance와 같은 유스넷의 뉴스그룹들도 차단해버린다. 미국시민자유연합(ACLU)의 기술 및 자유 프로그램의 책임자인 배리 스타인하트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도서관의 필터링에서 알 수 있듯이 정확하게 필터링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들조차 필터링하게 된다. 차단 기능을 과신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합법적인 컨텐트까지도 대량 차단하게 된다"라고 말했다. 1997년도에 이런 주제로 보고서를 발표한 이후로도 항상 문제점이 많은 필터들에 대해 경고를 하고 있는 ACLU에서는 공공 도서관들은 필터팅 제품들을 반드시 설치해야 한다는 연방법안을 바꾸기 위해 소송을 하기도 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스타인하트는 "결국 이 목록들도 독자적인 것들이다. 이 목록들을 직접 보지 않고서는 정확하게 어떤 것들이 차단되는지 알 수 없다. 공정한 판단을 위해서는 목록을 작성한 사람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한편 세이프서치에서는 ‘girls’라는 단어도 필터링하고 있다. 세이프서치에서는 사립여학교의 웹사이트인 GirlsSchoolOfAustin.org, 그리고 결혼식 드레스 가게인 DressyGirls.com과 러시아의 음악 밴드 사이트인 TatuGirls.com, 그리고 고양이에 관한 시를 주로 싣고 있는 웹사이트인 TheCalicoGirls.com 등도 잘못 차단되고 있는 예이다. 당연히 도메인명에 ‘Porn’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것도 문제가 된다. 세이프서치에서는 프랑스 해변가의 한 작은 마을인 포르니셰에서 관광사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만든 Pornichet.org도 차단해버렸다. 그뿐 아니라 뉴욕에 있는 비즈니스 컨설팅 회사인 SpornGroup.com, 애견 용 줄을 판매하는 Sporn.com, 그리고 Pornk라는 밴드의 웹사이트인 PornkRocks.com을 비롯해서 아동 포르노의 반대를 위한 독일의 웹사이트인 Anti-Kinderporno.de 등도 차단되어 있다. 세이프서치에서 차단해버린 PartsExpress.com의 정보 시스템 책임자인 애런 울프는 자기네 회사는 도메인명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글자 배열들을 빼버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울프는 "우리는 도메인명을 Parts-Express.com으로 약간 바꿀 예정이다"라고 하면서 이렇게 이름을 약간 바꾸면 "이메일 서버에 들어가 있는 스팸 필터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 |
‘걸인의 하루 수입은 얼마?’ 황당 경험담 이어져 | |||||||||
[국민일보 2004.08.28 02:20:09] | |||||||||
‘걸인의 하루 수입은 과연 얼마나 될까?’경제가 어려워져서인지 길거리나 지하철에서 부쩍 노숙자와 걸인을 많이 보게되는 요즘. 그들의 수입이 과연 얼마나 될지를 놓고 생생한 경험담을 곁들인 토론이 벌어졌다. 토론은 우연히 걸인이 수북한 돈뭉치를 세고있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 한 네티즌이 이들의 하루 수입이 얼마인지 궁금하다는 글을 올리면서 시작됐다. 디브이디프라임(www.dvdprimr.com)의 ‘헉짱’ 회원은 우선 장애인이나 사회적 약자를 비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 뒤 “지하철에서 오후 4시쯤 한 장애인 걸인이 40∼50만원 정도를 세어보고는 옆 칸으로 넘어가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며 “10칸짜리 지하철에서 한 칸당 5백원씩만 받고 하루 10번만 돌아도 5만원이다. 이만하면 웬만한 샐러리맨을 뺨치는 금액”이라고 허탈해했다. 글을 읽은 다른 회원들은 걸인들의 벌이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올리거나 구걸하는 사람들과의 황당한 경험담들을 쏟아냈다. ‘라키시스’는 “고등학생때 아르바이트 하던 곳으로 걸인이 매일 동전을 바꾸러 왔다”며 자신이 겪었던 일화를 소개했다. 그는 “그 걸인이 매장 앞에서 자장면을 먹으며 돈을 새는데 말이 안나올 정도로 많았다”며 “그가 갖고 있는 4개의 통장중 하나를 우연히 보았는데 그 안에는 약 3000만원 정도가 있었으며 나중에 알고보니 그는 연립주택 소유주였다”고 적었다. ‘플젝러버’가 소개한 내용은 더욱 황당하다. “지하철 1호선 청량리역 쪽 지하로 들어가는 구간에서 단속반이 뜨자 앉은뱅이 걸인이 구걸하다 말고 마법처럼 일어섰다. 더구나 당시 난 그 걸인에게 돈 천원짜리 한 장을 준 상태여서 더욱 기가 막혔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한 그는 “단속반은 이들의 하루 매상(?)이 약 30만원 된다고 귀띔했다”고 전했다. 고급승용차에서 ‘구걸 도구’를 내리다 ‘딱 걸린’ 일화도 눈에 띈다. ‘가경동거실극장’은 “청주의 한 육교에서 바구니와 스피커를 놓고 구걸하던 분이 새벽에 그랜저에서 스피커를 내리는 장면이 목격됐다”고 말했다. 지하철 공익근무요원이었다는 ‘neobutton’이 올려준 이야기도 상식을 뛰어넘는다. “공익때 너무 많이 봐서 걸인들 벌이가 많다는 글이 올라와도 별로 놀랍지 않다”는 그는 “장애인증을 위조해서 가지고 다니던 한 대학생은 가방에서 80만원정도의 현금이 나왔다. 지하철 한칸에 약 5명의 사람이 천원씩 주고 10칸을 다 돌면 5만원이다. 그 전철이 2분에 한대씩 오고, 10칸 다 도는데 약 30여분이 소요가 되니 하루 투자하면 짭짤한 정도를 넘어설 것”이라고 말했다. 회원들은 또 “공항에서 30대 정도의 아주머니 걸인이 돈을 달라고 해 거절했더니 팔뚝을 물었다”(망치맨), “목에 불우이웃돕기라고 상자를 걸고 대학로 횡단 보도에서 구걸하는 아주머니들은 다 가짜다. 돈통이 다 차면 어느 남자가 그 통을 바꿔간다”(cinemapapa)는 등 안좋은 추억담을 늘어놓기도 했다. 예상밖으로 걸인들이 돈을 많이 번다는 글이 이어지자 ‘소리아빠’는 “요즘 밥벌이도 힘든데 나도 역으로 출근 해볼까”라며 우스갯 소리를 던진 뒤 “그러나 걸인이 돈을 아무리 많이 번다고 해도 힘들게 번 소중한 돈이 아니니 별로 부럽지는 않다”고 일갈하기도 했다. 또 ‘SpotX’는 “굽은 허리에 미안해하며 껌을 내미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물건은 값이 두배라도 꼭 산다”며 “할머니 생각을 하면 안살 수 없다”고 적기도 했다.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자존심도 버리고 선택하게되는 구걸행위. 이마저도 몇몇 파렴치한 사기꾼들에게는 돈벌이 수단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세태다. 인터넷뉴스부 김상기기자 kitting@kmib.co.kr |
남자들이 예뻐지고 있다 |
[조선일보 인턴 기자] 남자들이 아름다워지고 있다. 권상우,강동원 등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남자 배우들의 공통점은 '곱상한' 외모다. 남자의 곱상한 미모는, 종전에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가 풍기듯이 일종의 흠과 같았으나, 최근에는 '꽃미남'으로 불리면서 남자의 새로운 매력이 되고 있다. 그에 따라 남성의 매력을 보조해주던 화장품도 발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남성다움을 상징하던 코 매운 스킨이 순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스킨 로션에 국한되어있던 제품군도 에센스와 화이트닝, 자외선 차단제는 물론 메이크업 제품과 마스크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남성화장품의 시장 규모도 2001년 약 1600억원, 2002년 1800억원, 2003년 2600억원대로 큰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남성화장품의 비약적인 성장에 "남성화장품은 국내 침체된 화장품 시장에서 떠오르는 해결책"라고 화장품 회사 태평양 관계자는 말했다. 온라인 시장에서의 매출도 늘고 있다. 온라인 쇼핑몰 ‘디앤샵’(dnshop.daum.net) 홍보팀의 허지연씨는 “2003년에 비교하여 2004년이 다소 성장세가 둔화되고 있으나 남성화장품은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고 밝혔다.
소망화장품은 국내업체중 남자 화장품 시장을 본격적으로 공략한 업체. 1992년 창립과 동시에 ‘꽃을 든 남자’ 란 남성용 브랜드를 내세워 스킨 샤워 제품을 출시했으며, 2002년에는 남성전용 커버로션인 컬러 로션을 선보였다. 컬러 로션의 경우 판매 시작 6개월 만에 500억원 매출을 달성할 만큼 시장에서 선풍적인 반응을 얻었으며, ‘남자도 메이크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후 2003년에 출시된 기능성 화장품 ‘에소르 화이트’는 미백기능을 첨가하여 개선된 제품이다. LG생활건강도 기존 ‘보닌 모노타임’에서, 남성 전문 피부 관리를 표방하는 ‘보닌’으로 새롭게 제품을 내놓고 시장 수요에 대응하고 있다. ‘보닌’은 제품을 좀더 세분화해 ‘더 스타일 라인’과 ‘화이트 스타일 라인’으로 내놓고 있으며 소비자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올해 6월, 태평양 ‘미래파’브랜드로 출시된 남성용 ‘마스크팩’은 두 달만에 약 1만개, 매출 기준으로는 약 2억5,000만원을 올리는 등 폭발적인 인기를 보이고 있다. 다른 브랜드에서도 벤치마킹한 제품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올해 8월, 이서진을 모델로 한 애경 남성화장품 ‘포튠 마스크팩’은 '이서진팩'으로 불리며 출시 열흘 만에 1만개가 팔려나갔다. 또한 인터넷 쇼핑몰 ‘디앤샵’에서는 지난 주 판매 상품 3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권상우를 모델로 내세운 ‘더페이스샵’의 마스크팩도 두 달 동안 240만5000개가 판매됐다.
남성화장품 구매자의 대부분은 여성이다. “'남자가 무슨 화장품이냐'는 사회의 통념 때문에 화장품을 직접 사는 것을 꺼린다”(이모씨·서울 마포구 창신동·26)는 말처럼, 아직도 일부 남자들은 화장품 구입을 위해 직접 손을 내밀지 않는다. 온라인 쇼핑몰 '여인닷컴' 과 '디앤샵'의 화장품 판매 담당 관계자들도 남자화장품은 남성고객보다 여성고객이 2배는 많다고 밝혔다. 김주덕 숙명여대 원격대학원 교수(향장미용학)는 “머리 염색이 여성들로부터 시작되서 남성들도 일반화가 된 것처럼, 기능성 화장품도 남성에게 곧 일반화가 될 것”이라며, “특히 스트레스, 환경오염등으로 여드름은 성인 남성들의 고민거리가 되고 있어 앞으로 여드름 개선, 모공 관리, 에센스가 크게 성장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미 일본과 유럽 등에서는 남성화장품이 큰 시장이다. 피부의 모공과 잔주름을 커버하고 여분의 피지를 컨트롤해주는 파운데이션류나, 담배와 술에 찌든 입술에 혈색을 더해주는 착색제 등 남성과 여성이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유니섹스’개념의 메이크업 제품까지 나와 있다. 시장이 포화가 되면 시장을 확대해서 살 길을 모색하는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