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
속눈썹맨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최근에 받은 트랙백

글 보관함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직장인 10명 중 8명은 '자신이 회사에서 공정한 연봉협상을 하지 않고 있다'고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채용정보 네트워크 커리어(www.career.co.kr)가 다음취업센터(job.daum.net)와 함께 12월 8일부터 13일까지 직장인 777명을 대상으로 "직장에서 연봉를 협상하는 방식은 무엇입니까?"라는 주제의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43.1%인 335명이 '협상없이 일방적인 회사의 통보'라고 응답했다.

다음으로 35.8%인 278명이 '인상율을 정해 놓은 형식적인 협상'이라고 응답해 약 79%가 '공정한 연봉협상이 없다'는 응답 결과를 보였다.

반면 '실적 및 인사평가를 통한 협상을 하고 있다'는 응답은 21.1%(164명)에 그쳤다.

응답자의 근무형태별 결과로는 대기업 및 중견기업 근무자의 27.7%, 벤처기업 근무자의 27.9%가 '실적 및 평가를 통한 협상'이라고 응답해 비교적 높은 비율을 보였으나, 중소기업 근무자 중 이와 같은 응답을 보인 비율은 15.9%, 외국계기업 근무자는 18.4%에 머물렀다.

특히 중소기업 근무자의 절반 이상인 51.3%와 공사 및 공기업 근무자의 40%가 '협상 없이 일방적인 통보'라고 응답해 중소기업과 공기업 등에서 실질적인 인사평가를 통한 연봉협상 비율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외국계 기업 근무자의 46.9%가 '인상율을 정해 놓은 형식적인 협상'이라고 응답했다.

커리어 관계자는 "대다수의 기업들이 연봉제를 실시하고 있지만 공정한 인사평가 시스템을 통한 연봉의 차등화보다는 전통적인 한국식 고용구조에 근거를 둔 호봉 중심의 형식적인 협상을 통해 인건비를 책정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응답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
진정한 협상은 역시 스타가 되서 안 주면 옮긴다고 하든지,
다른 회사로 옮길 때 뿐인 듯.

[기사]노는 아이가 머리도 좋다

2004. 12. 12. 14:49 | Posted by 속눈썹맨

















노는 아이가 머리도 좋다
취학전 학습지에 파묻히면 창조력 발달 안해
미디어다음 / 박선미 통신원







지난 5월 5일 어린이날 어린이들이 고무공을 굴리며 즐거워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누구나 자신의 아이는 특별하고 똑똑한 아이로 키우고 싶어 한다. 사람의 두뇌가 태어날 때 이미 형성되어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고정관념이다.

전문가들은 출생 초기의 후천적인 경험과 자극이야말로 두뇌의 기능을 담당하는 신경 결합을 형성해서 두뇌 발달을 도와주는 촉진제라고 말한다.

노벨의학상을 수상한 미국 신경생물학자 로저 스페리 박사(Roger W. Sperry)는 인간의 두뇌는 우뇌와 좌뇌로 구분되며 그 기능이 다르고 특히 3세 때에는 우뇌가 80%, 좌뇌가 20%를 차지하여 좌뇌보다 우뇌가 발달하는 시기라고 밝혔다.

사람의 좌뇌와 우뇌는 각기 다른 기능을 하고 있다. 좌뇌는 언어 능력, 분석 능력 등 이성적인 기능을 담당하고, 우뇌는 창의력, 직관력 등 종합적인 기능을 담당한다.

좌뇌와 우뇌가 조화를 이루면 두뇌의 전반적인 능력이 향상된다. 창의력이나 독창력 같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는 능력은 우뇌에 있지만 우뇌의 아이디어도 그 자체를 언어로 바꾸려면 좌뇌와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뇌 의학자들은 사람이 성장하면서 만 7세까지는 우뇌의 발달이 주로 이뤄지고, 그 다음부터는 좌뇌가 발달하기 시작한다고 분석한다.

그래서 요즘 아이들처럼 우뇌를 발달시켜야 할 시기에 학습지에 파묻혀 지내는 것은 좌뇌만 혹사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우려한다. 더구나 어려서부터 학습지에 매달리게 되면 창의성이 개발이 되지 않을 뿐더러 막상 학교에 입학해서 본격적으로 좌뇌를 개발해야 할 시기에는 학습에 흥미를 잃어버리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전문가들은 7세 이후에는 학교에서 좌뇌 발달이 자연스럽게 이뤄지기 때문에 그 전에는 마음껏 놀 수 있도록 해 우뇌 개발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예전에 하던 놀이 중에 돌을 이용한 땅따먹기, 공기놀이, 소꿉놀이, 두꺼비집 놀이 등은 손동작과 시각이 조화를 이루면서 근육과 우뇌를 발달시킬 수 있는 자연스러운 놀이 활동이다. 집안에서 학습지에만 매달리는 요즘 아이들은 오히려 뇌의 균형적인 발달을 저해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제2의 뇌’라고 할 수 있는 손은 인간의 육체 중에서 감각기관이 가장 많이 모인 곳이므로 연필, 숟가락, 젓가락, 가위 등의 사용법을 빨리 익히도록 해야 하며, 직관력, 상상력, 창조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는 퍼즐이나 나무 쌓기 등의 놀이를 가능한 한 많이 하도록 해야 한다. 또 구체적인 놀이나 학습이 아니더라도 생활 속에서 아이의 생활 습관을 바로잡아 주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두뇌 자극이 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대리운전 찾거나 운전자 지명 관행화 필요"

(서울=연합뉴스) 강훈상 기자

각종 모임의 시즌인 연말이 찾아왔다.

연말 모임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은 바로 술. 음주 다음날 출근 때문에 술에 취해도 운전대를 잡는 운전자들이 연중 어느 때보다 늘어나는 시기다.

`이 정도 쯤이야' 하는 생각에 음주운전을 하다 사고를 내면 치러야 할 대가는 얼마나 될까.

회사원 A(33)씨는 송년회 모임에서 소주 1병을 마시고 운전하다 빨간불에 멈추지 못해 사람을 치어 전치 4주의 부상을 입혔다.

성인 남성의 경우 소주 1병을 마시면 혈중 알코올 농도가 보통 0.1% 이상이 되는데 이 상태에서 인사 사고를 낸다면 종합보험에 가입했어도 벌금, 대인ㆍ대물 면책금, 형사합의금 등이 필요하다.

A씨는 일단 음주운전에 따른 약식기소 벌금을 200만∼300만원을 내야 하고 혈중 알코올농도가 0.1% 이상으로 면허가 취소되기 때문에 운전면허를 다시 따려면 150만원 정도가 필요하다.

여기에 변호사 선임비용 500만원과 인사사고 면책금 200만원이 더 필요하며 음주운전을 할 경우 보험처리가 제외되므로 자차 수리비도 100만원 정도 든다.

4주 부상을 입은 피해자와 합의를 하려면 1주 부상에 70만원 꼴이기 때문에 280만원 정도를 합의금으로 준비해야 하며 보험할증료와 기타비용 등도 200만원 가량이든다.

이 비용을 모두 합하면 1천500만원 정도로 A씨는 소주 1병과 준중형차 한대 값을 맞바꾼 셈이 된다.

더욱이 음주운전을 해 적발이 되면 직장에서 인사상 불이익을 당할 수 있고 음주운전 상태에서 인명사고까지 낸다면 `패가망신' 수준의 처벌을 받게 된다.

전문가들은 주종(酒種)에 따라 잔의 크기가 다르기 때문에 체중 70㎏의 성인은 어느 술이든 3∼4잔만 마시면 혈중 알코올 농도가 면허 정지에 해당하는 0.05∼0.06%가 된다고 말한다. 취기를 느끼지 않아도 운전을 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다.

굳이 차를 집까지 가져가려고 한다면 대리운전을 이용하는 게 좋지만 최근 대리운전자 가운데 초보운전자가 많은 만큼 보험가입 여부와 대리운전자의 경력을 꼼꼼하게 따지는 게 좋다.

대리운전으로 집에 도착하더라도 아파트 입구나 집 근처에서 대리운전자를 보내지 말고 반드시 주차장까지 대리운전자에게 운전을 맡겨야 한다.

혈중알코올농도는 시간당 평균 0.015% 포인트씩 감소해 과음을 했다면 적어도 반나절이 지나야 단속 기준 이하로 떨어지기 때문에 과음 뒤라면 출근길에도 운전대를 잡지 않는 게 좋다.

자동차 10년타기 시민운동연합의 임기상 대표는 "경찰 역시 연말 교통사고 예방을 위해 음주운전 단속을 강화하고 있지만 무엇보다 음주운전을 스스로 자제하는 일이 최선책"이라며 "술자리에서 운전자를 지명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
변호사에게는 500만원 주면서, 다친 사람에게는 280만원만 주는 이유는 뭘까?;;
돈을 벌려면 역시 자해공갈단보다는 변호사가 되는 게 나은 길이라는 걸 알려주는 건가.








미디어 제국 꿈꾸는 애플「돌풍의 비결은?」
사용자 관점에서 알아보는 애플의 미디어 전략




박재호 (휴비츠 선임 연구원)







2004/12/11










‘조만간 애플이 죽어요’라고 호언장담했던 업계 분석가들의 예상과는 달리, 하드웨어 부문과 소프트웨어 부문을 통틀어 애플은 여전히 건재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온라인 음악 시장 부문에서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돌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냅스터와 같은 선발주자와 MS, 리얼 네트웍스와 같은 쟁쟁한 회사를 제쳐두고 애플을 온라인 미디어 세계를 이끌어가는 선두주자로 만들었을까? 이런 비밀을 풀기 위해 미디어 서비스를 소비하는 일반 사용자 관점에서 애플의 미디어 전략을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번 원고를 준비할 무렵 소니, 50억 달러에 MGM 인수「컨텐츠 강자로 우뚝」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접할 수 있었다. 이미 제너럴일렉트릭은 전통적인 굴뚝 산업 부문은 축소하는 대신 미디어 부문을 강화하기 위해 NBC와 비방디 유니버설을 매입한 바 있으며, 소니뮤직과 소니픽처스 엔터테인먼트(구 컬럼비아 영화사)를 운영하고 있는 소니는 메이저급 영화사이며 시작 화면에서 포효하는 사자로 유명한 MGM(메트로 골드윈 메이어)까지 계열사로 거느리게 됐다.

이와 함께 MS는 뒤늦게 미디어 플레이어 버전 10을 출시하는 동시에 MSN 온라인 뮤직 스토어(beta.music.msn.com)를 열어서 애플을 추격하려고 노력 중이고, 거금을 들여 뮤직매치를 인수한 야후는 올해 4분기 중에 자체 음악 서비스를 오픈할 계획이라고 밝혔으며, 리얼 네트웍스는 아이포드 DRM인 페어플레이(PairPlay)를 역공학으로 분석해서 자사 온라인 음악을 아이포드에서 동작시키도록 함으로써 잃어버린 온라인 음악 시장 쟁탈전에 불을 지폈다.







<화면 1> MSN 온라인 뮤직 스토어
이렇게 미디어 사업을 둘러싸고 여러 회사가 거실을 점령하기 위해 사활을 건 진검 승부를 벌이는 가운데 유달리 돋보이는 회사가 하나 있는데, 놀랍게도 이 회사는 바로 애플이다.

올해 9월 17일자 디지털타임스 기사에 따르면 애플은 아이포드와 아이포드 미니로 9월 첫째 주에 시장점유율 36.2%(금액 기준 50.8%)를 달성함으로써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으며, 올해 8월 27일자 전자신문 기사에 따르면 디지털 음악 플레이어 시장에서 25~30%(이는 플래시형 MP3P 시장을 포함한 수치이므로, 하드디스크형 MP3P 시장에서는 거의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보면 틀림없다)를 달성했으며, 온라인 다운로드 시장에서는 70% 정도 점유율(올해 7월 11일에 1억곡 다운로드를 달성했다)을 차지하고 있는 절대적인 강자이다.

냅스터와 같은 막강한 지지층도 없으며, 소니와 같이 영화나 음반사를 하나도 보유하고 있지 않으며, MS처럼 거의 업계 표준으로 자리잡은 운영체제를 갖추지 못한 애플이 이 정도 업적을 달성한 사실은 거의 기적에 가까워 보인다. 도대체 어떤 무기로 사용자를 구워삶은 것일까? 애플이 미디어 통합에 얼마만큼 공을 들였는지 실제 사용자 관점에서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단순함의 미학’을 추구하는 매킨토시
매킨토시 노트북인 아이북, 파워북이나 아이맥 시리즈를 처음 보면 단순한 외형과 기능에 한 번 놀라고 사용 편의성에 두 번 놀란다. 예를 들어 아이북, 파워북은 시중 노트북에서 찾아볼 수 있는 전원을 켜지 않고서도 CD를 재생할 수 있는 버튼도, 자주 사용하는 응용 프로그램을 위한 별도 버튼도, 현재 배터리 용량과 무선 LAN 상태를 알려주는 작은 LCD 창도 없다. 노트북 LCD를 여닫는 버튼 하나만 달랑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LCD를 열고나서 전원 버튼을 누르면 그 다음부터는 본체에 수많은 버튼이 달려있지 않아도 직관적인 방법으로 노트북을 사용할 수 있다. 아이포드나 아이포드 미니도 마찬가지다.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FM 라디오 수신, 음성 녹음, 구간 반복, 그래픽 이퀄라이즈 표시 기능과 같은 화려한 기능은 쏙 빠져있으며, 전자기기에 의례적으로 달려있는 전원 스위치도 없으며, 심지어 단순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아이포드 4세대와 아이포드 미니는 아이포드 3세대에 있었던 메뉴 버튼조차도 휠로 통합시켜 버렸다. 하지만 원하는 음악을 빨리 찾아서 즐겁게 듣는 과정에서 아이포드의 위력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경쟁을 위해 온갖 부가 기능을 계속해서 추가하고 있는 다른 회사와는 달리 애플은 사용자가 필요한 작업을 최대한 쉽고 빠르게 수행할 수 있도록 강박관념에 가까운 모험을 감행하곤 한다. 저가격 모델인 아이북만 하더라도 데스크탑에서 볼 수 있는 복잡한 요소를 제거하는 대신 노트북이 갖춰야 할 좋은 특성을 강화하는 방법으로 발전시켜왔다.

폴리카보네이트를 사용한 견고한 본체, 멀리 떨어진 건물의 AP까지 잡아버리는 뛰어난 무선 네트워크 수신율, 5시간에 걸친 세미나 세션을 버텨내는 강력한 배터리 수명, 공간 절약을 위한 슬롯 로딩 광학 드라이브,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잠자기/깨어나기 기능은 이동성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노트북을 어떻게 설계해야 하는지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애플은 아이북, 파워북 시리즈로 자신감을 얻었는지, 올 가을에 열린 파리 엑스포에 등장한 아이맥 G5에는 17인치와 20인치 LCD 모니터 뒷면에 CPU·메모리·메인보드·하드디스크를 집약해서 공간 활용도를 극대화하는 동시에 개인용 컴퓨터에서는 보기 드물게 64비트 CPU인 G5를 탑재해서 성능이라는 장벽까지도 훌쩍 뛰어넘어버렸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전원 스위치를 뒷면 포트 하단부로 옮기고 스피커도 베벨 아래쪽에 붙여서 미니멀리즘적인 외형을 자랑한다. 또한 입력 장치를 위해 블루투스 옵션을 BTO(Built To Order)로 붙인 다음 무선 키보드와 마우스를 주문하고 무선 랜 환경을 위해 에어포트 익스트림 카드를 장착한다면 전원 선 하나만 필요할 뿐이다.












 
<화면 2>신형 아이맥 G5 전면 모습   <화면 3> 신형 아이맥 G5 후면모습
‘선택과 집중’이라는 말이 있다. 애플은 호기심에서 몇 번 사용한 다음에 그 다음부터는 썩혀버리는, 시스템 복잡성만 높이는 부가 기능을 제외하는 대신 자주 사용하는 기능을 선택해서 이를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를 집중하는 방법으로 하드웨어를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다. 이런 단순함을 중요시하는 철학은 비록 기능을 극도로 단순화한 라디오지만 작은 명품으로 당당하게 대접을 받는 티볼리 오디오(www.tivoliaudio.co.kr)와 궤를 같이 한다.

“요즘 웰빙과 함께 ‘자발적 단순함’이 삶의 방식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오디오도 그렇다. ‘단순함 만세’다. 복잡한 기기의 정글에서 벗어난 좋은 음악에 사람들은 목말라 한다. 혹시 당신이 음악을 듣고 싶다면 먼저 목표를 정하라. 음악인가, 기계인가?”

‘자발적 단순함’은 비단 음악 부문에만 국한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비록 음악 애호가도 아니며 영화광도 아닌 필자이지만 취미생활을 다른 부수적인 사항을 걱정하지 않고 단순하게 즐기기 위해 아이북, 아이포드, 티볼리 오디오 시스템을 갖췄다고 말하면 과장이 지나친 것일까?







<화면 4> 필자가 보유하고 있는 아이북, 아이포드, 에어포트 익스프레스, 티볼리 오디오 시스템(사진을 찍기 위해 스피커 위치를 이동했다)
창의적인 작업을 도와주는 맥 OS X
윈도우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리눅스를 설치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돌발 상황(물론 요즘 리눅스 배포판은 비약적인 발전에 힘입어 마법사와 GUI를 통한 설치 시스템은 기본이며, 구식 장치 감지 능력이나 호환성과 같은 몇몇 측면에서는 윈도우를 능가하는 편의성을 자랑한다)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었다. 설치 절차에 대해 숙지하고 있어야 할 뿐더러, 설치에 앞서 자신이 사용하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환경 설정에 대해 너무나도 세부적인 정보를 알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설치가 끝나고 나면 별로 어려운 작업도 아니지만, 막상 설치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리는 시간을 합치면 결코 녹록하지 않다.

그런데 사물을 보는 관점이란 상대적인 것이라서 매킨토시 사용자가 윈도우 사용자를 바라보는 시각도 이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주의 : 필자는 매킨토시, 윈도우, 리눅스를 사용하고 있으며, 어디까지나 도구일 따름인 운영체제를 특정 제품만 고집하라고 강권하지 않는다. 상황에 맞춰 필요에 따라 운영체제를 올바르게 선택해서 잘 쓰면 된다).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최근에 필자가 윈도우 2000를 설치할 기회가 있었는데, 서비스 팩을 내려받는 중에 꼼짝없이 당한 웜 바이러스 공격, 쥐도 새도 모르게 당한 악성 코드 감염, 구식 장치를 제대로 지원하지 않는 디바이스 드라이버 충돌로 인한 ‘죽음의 푸른 화면(BSOD, Blue Screen of Death)’으로 인해 자그마치 세 번씩이나 운영체제를 지우고 새로 설치하는 작업을 반복했다. 유닉스 시스템 관리자로 여러 해 동안 복잡다단한 유닉스 운영체제를 설치해본 경험만을 믿고 섣불리 덤볐다가 삼천포로 빠진 상황이 되어버린 셈이다.

시스템 관리 경력이 있는 필자조차 운영체제를 설치하는 과정에서 발목을 잡혔던 상황인데, 일반 사용자들은 오죽하겠는가? MS가 리눅스를 목표로 벌이고 있는 캠페인인 ‘사실을 직시하라(Get the Facts, 참고자료 ?)’는 윈도우 계열 운영체제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매킨토시에서 맥 OS X을 사용하는 순간 윈도우에서 겪었던 여러 가지 문제점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다. 운영체제를 설치하면서 받는 스트레스는 물론이고 잦은 응용 프로그램 설치와 바이러스, 애드웨어로 인한 레지스트리 오염, 윈도우 사용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겪었을 시스템 DLL 충돌 문제, 서비스 팩과 보안 패치를 인터넷에서 다운받는 동안 이미 시스템에 침투해버린 웜 바이러스 문제 등을 한방에 해결할 수 있다.

물론 맥 OS X도 신이 내린 완벽한 운영체제는 아니므로 주기적으로 시스템 업데이트를 통한 보안 패치와 하드디스크 공간 절약과 퀵 실버(quicksilver.blacktree.com)나 버틀러(www.petermaurer.de/nasi.php?thema=butler&sprache=English)와 같은 응용 프로그램 런처의 색인 속도 향상을 위한 불필요한 실행 파일 정리가 필요하지만, 윈도우 계열 운영체제에 비하면 관리 부문에서 지극히 적은 시간을 뺏길 뿐이다.

이렇게 맥 OS X을 사용할 경우에는 윈도우를 사용하면서 생산성 낮은 작업(운영체제 설치, 웜 바이러스 퇴치를 위한 서비스 팩과 패치 설치, 바이러스 퇴치를 위한 백신 설치와 운영, 주기적인 레지스트리와 불필요한 프로그램 정리)에 투입했던 시간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할 수 있다. 따라서 회사에서는 업무를 위해 윈도우를 설치한 PC를 사용하다가, 집에만 돌아오면 컴퓨터 자체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여가를 즐기기 위해 습관적으로 맥 OS X을 설치한 매킨토시를 사용하는 사용자가 점차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미디어 편집과 재생을 위한 소프트웨어, i 시리즈
아무리 하드웨어와 운영체제가 좋더라도 이를 뒷받침해주는 응용 프로그램이 존재하지 않으면 일반 사용자 관점에서는 ‘빚 좋은 개살구’가 되어버린다. 매킨토시 컴퓨터는 하드웨어 디자인은 물론이고 탑재되어 있는 맥 OS X 자체도 무척 매력적이지만, 맥 OS X에 기본으로 따라오는 멋진 응용 프로그램이 없다면 ‘앙꼬 없는 찐빵’일 따름이다.

맥 OS X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멀티미디어용 소프트웨어는 바로 iLife이다. 업무용 시장에서 워드 프로세스, 스프레드시트, 프리젠테이션 소프트웨어를 포함한 MS 오피스가 절대적인 강자로 군림하고 있지만, 멀티미디어 부문에서는 특별한 킬러 애플리케이션을 떠올리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GarageBand, 아이튠즈, iPhoto, iMove, iDVD로 무장한 iLife를 접하고 나면 생각이 바뀔 것이다. GarageBand가 나오기 전까지 응용 프로그램 앞에 i자가 붙었다고 해서 i 애플리케이션이라고 불렸던 각 프로그램은 전문가(주의 : 전문가라면 고가의 전용 소프트웨어를 구입해야 할 것이다)가 아닌 일반 개인 사용자가 작곡, 음악 재생, 사진 관리, 비디오 편집, DVD 제작을 하기에 적합한 기능을 갖추고 있다.







<화면 5> 사진 관리 시스템인 iPhoto
iLife에 들어 있는 각 소프트웨어는 독립적으로 봐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지만, 오피스에 들어있는 응용 프로그램처럼 함께 연결해서 사용하면 더욱 높은 생산성을 발휘할 수 있다. 오라일리에서 출간한 「MAC OS X HACKS」을 읽다 보면 아이튠즈, iPhoto, iMove를 연동해서 영화를 한편 만드는 팁이 나오는데, i 애플리케이션을 매체별로 데이터베이스로 취급해서 음악은 아이튠즈에서, 사진은 iPhoto에서 각각 필요한 자료를 다운받은 다음에 최종적으로 iMove에서 필요한 자료를 취합해 스토리보드에 맞춰 영화를 제작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만일 반복적인 작업이 필요하거나 응용 프로그램 연동을 자동화하고 싶다면 애플스크립트(www.apple.com/applescript)를 활용해서 i 애플리케이션을 제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i 애플리케이션이 인기를 얻자, 애플은 물론이고 다른 소프트웨어 회사에서도 i자를 앞에 붙인 응용 프로그램을 대거 만들게 된다. 애플에서 만든 일정관리 시스템인 iCal과 채팅 프로그램인 iChat를 비롯해 개인이 만든 터미널 흉내내기 프로그램인 iTerms와 같은 응용 프로그램이 대표적인데, iLife에 들어 있는 응용 프로그램과 마찬가지로 필요한 기능을 코코아 인터페이스에 담아서 예쁘면서도 일관성을 유지하며 사용하기 쉽게 만들었다는 특징이 있다.












 
<화면 6> 일정 관리 시스템인 iCal   <화면 7> iChat에서 볼 수 있는 단순함의 미학을 그대로 계승한 RSS 리더인 NewsFire












 
<화면 8> 코코아 인터페이스의 교본으로 삼을만한 벡터 드로잉 프로그램인 Omni Graffel   <화면 9> 간결한 인터페이스를 자랑하는 맥 OS X용 워드 프로세서인 나이서스 익스프레스

매킨토시 하드웨어부터 시작한 ‘복잡하면서 자주 사용하지 않는 기능은 제거하고 꼭 필요한 기능은 쉽게 만들자’는 일관성은 iLife를 비롯한 i 애플리케이션은 물론이고 일반 매킨토시 소프트웨어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데, iChat를 오마주하느라 너무나도 단순한 인터페이스를 채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도 모르게 손이 가는 RSS 리더인 NewsFire(www.newsfirerss.com), 코코아 인터페이스의 교본으로 삼아도 손색이 없는 벡터 방식 드로잉 프로그램인 Omni Graffel(www.omnigroup.com/applications/omnigraffle), 과거 대표적인 매킨토시용 워드 프로세서였던 나이서스를 맥 OS X용으로 업그레이드한 나이서스 익스프레스(www.nisus.com/Express)를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겠다.

이상에서 소개한 소프트웨어는 강력한 벡터 드로잉 프로그램인 비지오(Visio), 회사에서 거의 표준으로 사용하고 있는 워드와 같은 걸출한 윈도우 계열 소프트웨어와는 달리 기능적인 측면에서 부족한 점이 많지만 사용 편의성과 작업 효율성 측면에서 월등하게 뛰어나다는 장점이 있다.

음악을 듣고, 디지털 카메라에서 찍은 사진을 정리하고, RSS 리더기로 블로그 헤드라인을 검색하고, 웹 서핑을 하며(물론 액티브 X 컨트롤과 IE 전용 웹 사이트가 많은 한국에서는 매킨토시에서 사파리나 불여우(FireFox)를 사용하기란 상당히 힘든 일이긴 하다), 주소록과 일정을 관리하기 위해 복잡한 소프트웨어를 사용한다는 사실 자체가 스트레스인데, 매킨토시를 사용할 경우에 이 모든 작업을 즐겁게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이 놀랍지 않은가?

아이튠즈, 애플 뮤직 스토어, 아이포드
앞서 i 애플리케이션을 설명할 때 한 가지 빠뜨린 친구가 있다. 바로 음악 재생과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위한 소프트웨어인 아이튠즈이며, 이 응용 프로그램은 애플의 미디어 전략을 이끌어나가는 일등 공신으로 생각할 수 있다. 매킨토시라는 그들만의 잔치에서 벗어나 일반 PC에서도 아이포드와 연동할 수 있는 윈도우용 아이튠즈를 발표하면서부터 미디어 제국을 향한 애플의 행보는 무척 빨라지기 시작했다.

윈도우가 동작하는 PC 사용자를 맥 OS가 동작하는 매킨토시로 전환(switch)하려는 일련의 캠페인이 별로 효과를 거두지 못한 반면에, 윈도우용 아이튠즈를 발표함으로써 수많은 윈도우 사용자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다. 기존 PC에서 동작하던 어떤 MP3 소프트웨어도 따라가기 힘들 만큼 사용 편의성이 강화된 아이튠즈를 무료로 구할 수 있다는 사실에 PC 사용자들은 삼삼오오 관심을 표명하면서, 애플이라는 회사의 존재를 서서히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윈도우용 아이튠즈는 윈도우 2000과 XP에서 동작하며(아쉽게도 윈도우 98 SE에서는 동작하지 않는다), 맥 OS X용 소프트웨어와 비교하면 기능이나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거의 동일하다. 인터넷 연결이 가능할 경우 쓸 수 있는 그레이스 노트 CDDB(www.gracenote.com)를 사용한 트랙 목록 얻기 기능이나 키워드로 해당 음악을 찾아주는 빨리 찾기 기능은 맥 OS X은 물론이고 윈도우에서 동작하는 아이튠즈에서 동일하게 사용할 수 있다.

물론 애플 뮤직 스토어에 대한 접근도 윈도우와 맥 OS X 버전 모두 가능하다.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에어포트 익스프레스 접근을 위한 에어튠즈 기능도 윈도우와 맥 OS X 버전에서 똑같이 사용 가능하다.












 
<화면 10> 윈도우에서 아이튠즈로 차이코프스키 5번 교향곡에 담긴 트랙 목록을 CDDB로 얻어오는 화면   <화면 11> 매킨토시에서 아이튠즈로 Simply Baroque를 검색한 화면

이렇게 기존 매킨토시 애호가뿐만 아니라 윈도우를 사용하는 최종 소비자까지 아이튠즈 사용자로 합류하면서 애플이 자랑하는 뮤직 스토어 입지도 한층 견고해지기 시작했다. 99센트라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을 지불하면 너무나도 손쉽게 온라인으로 음악을 구입할 수 있으며, 특수 효과 측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영상 관련 회사인 픽사(www.pixar.com)의 CEO답게 스티브 잡스는 냅스터로 인해 온라인 음반 시장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품었던 음반 회사와 뮤지션을 끌어들여 20만곡이 넘는 음악을 입맛에 골라 구매할 수 있다.

이렇게 다운받은 음악은 아이튠즈를 사용해서 컴퓨터로 들을 수 있고, 아이포드로 옮겨들을 수도 있고, CD-ROM으로도 구워서 오프라인으로 들을 수도 있다. 이런 모든 작업은 물론 아이튠즈를 사용해서 직관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애플 온라인 뮤직 스토어는 지난 7월 초에 이미 다운로드 횟수가 1억을 돌파했는데, 음악 파일이 WMA이나 MP3 형식이 아닌 AAC(Advanced Audio Coding, www.apple.com/mpeg4/aac) 형식으로 인코딩했으며, 페어플레이라는 DRM으로 보호받고 있는 상황을 고려해볼 때 이는 정말 대단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즉 아이튠즈와 아이포드가 아닌 다른 소프트웨어나 하드웨어 장비를 사용해서 재생하려면 상당히 번거로운 작업을 거쳐야 하는데, 최종 사용자들이 이런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리얼네트웍스와 같은 경쟁사에서 운영하는 온라인 뮤직 스토어를 이용하지 않고 애플 온라인 뮤직 스토어를 이용한다는 이야기이다.







<화면 12> 매킨토시에서 아이튠즈로 접근한 뮤직 스토어
아이튠즈, 애플 온라인 뮤직 스토어와 더불어 최근 들어와서 애플이 자랑하고 있는 강력한 무기는 바로 아이포드이다. 아이포드가 처음 나왔을 때는 하드디스크 탑재형 MP3 플레이어가 전무했기에 짧은 재생 시간, 무게, 크기, 부족한 기능, 128MB면 충분할 텐데 GB에 이르는 메모리를 탑재했다는 오버 스펙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비판이 쏟아졌다.

하지만 초기 발매 당시부터 수천 곡이 넘어가는 음악을 저장할 수 있었던 아이포드는 기존 기술을 일거에 와해시킬만한 DNA를 품고 있었으며, 1, 2, 3, 4세대 아이포드와 아이포드 미니까지 지속적인 성능 개선 작업에 힘입어 서서히 MP3 플레이어 시장을 플래시 메모리형과 하드디스크형으로 양분하면서 급속도로 시장을 주도해나가기 시작했다.

애플은 여느 제품과 마찬가지로 초기 아이포드 모델에서 매킨토시 사용자를 염두에 둔 IEEE 1394 인터페이스를 고집하고 있으며, 아이튠즈도 매킨토시 버전만 제공했으나 아이포드 미니와 아이포드 4세대에 이르러서는 IEEE 1394 인터페이스는 물론이고 USB 2.0 인터페이스 케이블을 기본 사양으로 함께 제공한다. 특히 매킨토시용 윈도우용 아이튠즈를 발표함으로써 매킨토시 사용자는 물론이고 윈도우 사용자까지 아우르는, 도저히 애플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획기적인 전략을 펼치게 된다.

한걸음 더 나아가 풍부한 컨텐츠(애플 온라인 뮤직 스토어), 뛰어난 음악 관리 소프트웨어(아이튠즈), 최강의 MP3 플레이어(아이포드)가 삼위일체로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본 HP는 냅스터와 계약을 취소하고 자사 PC에 아이튠즈를 기본 소프트웨어로 번들하는 동시에 아이포드를 OEM으로 판매할 수 있도록 애플과 계약을 맺고 본격적인 아이포드 세몰이에 들어갔다. MTV 뮤직 어워드 시상식 때 힙합 스타 P. Diddy가 들고 나온 아이포드가 바로 뮤직 어워드 후원사인 HP에서 아이포드 판매 기념으로 특별히 제작한 버전이다.







<화면 13> HP에서 다이아몬드를 120개를 넣어 만든 아이포드
소니를 비롯해 여러 회사에서 하드디스크형 MP3P를 발매해서 애플을 추격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애플 CEO인 스티브 잡스는 “우리가 아이포드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볼 때 결국 경쟁 장벽은 소프트웨어가 되리라는 말이죠”라는 의미심장한 말로 자신감을 표명했다. 그렇다. 거대 미디어 업체인 소니가 아이튠즈와 같은 킬러 애플리케이션만 보유하고 있었더라도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에어포트 익스프레스와 에어튠즈
애플이 무선 네트워크 세계에서도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지난 1999년 하반기에 이미 802.11b를 지원하는 에어포트 베이스 스테이션 출시를 시작으로 다른 여러 회사에 앞서 54Mbps 대역폭인 802.11g를 지원하는 에어포트 익스트림 베이스 스테이션과 아이북·파워북은 물론이고 일반 매킨토시 데스크탑 컴퓨터에도 장착이 가능한 802.11g 지원 에어포트 익스트림 카드로 고성능 무선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지름길을 제공하고 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아이포드로 상당한 재미를 본 애플은 계속해서 미디어 부문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무선 네트워크와 미디어 기술을 결합한 에어포트 익스프레스라는 기발한 제품을 출시했으며, 현재 미국 애플 온라인 스토어에서 5위(이 원고를 집필할 시점에서 1위는 아이맥 G5, 2위는 아이포드, 3위는 아이튠즈 선물 티켓(iTunes Gift Certificate), 4위는 아이포드 미니였다. 5개 중에 4개가 미디어 관련 제품임에 주목하기 바란다)를 차지하고 있을 만큼 인기가 좋다.

에어포트 익스프레스는 그 자체만 놓고 보면 무선 공유기인데, 무선 네트워크를 통한 음악 전송이라는 추가적인 기능을 넣어 부가가치를 높인 제품으로 생각할 수 있다. 에어포트 익스프레스는 아이북 어댑터보다 좀 더 큰 크기(94mm×75mm×28.5mm)에 10/100base-T 네트워크 입력을 위한 RJ-45 단자, 프린터 공유를 위한 USB 단자, 일반 스테레오는 물론이고 광출력까지 가능한 3.5mm 미니 스테레오 단자를 내장하고 있으므로, 동시 접속자 수가 작고 무선 주파수가 미치는 범위가 비교적 좁은 멀티미디어 환경을 위한 가정용 무선 네트워크 솔루션으로 쓰기에 제격이다.

하지만 에어포트 익스프레스는 무선으로 즐기는 아이튠즈인 에어튠즈가 있어야 제 성능을 발휘한다. 에어포트 익스프레스를 거실에 설치하고 거실에 놓인 오디오와 연결한 다음(오디오가 3.5mm 미니 스테레오 입력을 지원하지 않으면 3.5mm 미니 스테레오 출력을 RCA 입력으로 변환하는 어댑터를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아이튠즈를 켜면 랑데부를 사용해서 자동으로 주변에 있는 에어포트 익스프레스를 감지한 다음에 음악을 내보낼 대상을 선택 가능하도록 만들어준다. 즉 최신 아이튠즈(이 기사를 집필할 시점에서 최신 버전은 4.6이다)를 설치하면 에어포트 익스프레스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게 되며, 별도로 독립된 에어튠즈 소프트웨어를 찾을 필요는 전혀 없다.

<화면 10>과 <화면 11>을 보면 화면 하단의 스피커 모양 옆의 ‘거실’이 바로 거실에 설치한 에어포트 익스프레스에 붙인 별명이다. 방마다 에어포트 익스프레스를 설치한 다음에 각각 별명을 다르게 붙여두면 이 별명만으로 원하는 장치에 쉽게 접근이 가능하다).

필자는 에어포트 익스프레스와 티볼리 오디오를 연결한 다음에 아이북에 설치한 아이튠즈를 열어서 무선으로 티볼리 오디오를 제어하고 있다. 즉 에어포트 익스프레스를 사용하면 번거롭게 거실이나 안방에 갈 필요 없이 원격으로 오디오 CD나 MP3/AAC로 인코딩된 디지털 음악을 재생할 수 있다.







<화면 14> 에어포트 익스프레스와 연결한 티볼리 오디오
에어포트 익스프레스는 아이포드와 마찬가지로 윈도우 사용자까지 끌어들일 목적으로 만든 제품이다. 일례로 에어포트 익스프레스를 구매하면 매킨토시와 윈도우에서 사용할 수 있는 관리 소프트웨어가 담긴 CD 한 장이 제품에 따라오는데, 무선 LAN 카드를 장착한 아이북과 PC 양쪽 모두 에어포트 익스프레스를 아주 쉽게 인식하고 설정하도록 도와준다.

윈도우용 에어포트 익스프레스 관리 소프트웨어는 윈도우 2000에서 동작하며(윈도우 98 SE 버전에서는 동작하지 않는다), 윈도우 XP를 사용할 경우 매킨토시용 에어포트 익스프레스 관리 소프트웨어와 유사하게 마법사가 떠서 설정을 도와준다. 물론 매킨토시용 에어포트 익스프레스 관리 소프트웨어는 맥 OS X 코코아 인터페이스를 활용해 마법사 방식으로 쉽게 에어포트 익스프레스와 관련한 환경 설정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준다. 필자는 아이북에 에어포트 익스트림 카드를, PC에는 D-Link에서 나온 DWL-G520+ PCI LAN 카드를 장착한 다음에 에어포트 익스프레스를 활용하고 있다.












 
<화면 15> 윈도우에서 동작하는 에어포트 익스프레스 관리 화면   <화면 16> 매킨토시에서 동작하는 에어포트 익스프레스 마법사 화면

별도 서버를 지정하는 번거로움 없이 프린터를 공유하고 싶다면 에어포트 익스프레스에 프린터를 연결한 다음에 랑데부(매킨토시)나 TCP/IP 프린팅 기능(참고자료 10)을 사용하면 간단하게 무선으로 인쇄 작업까지 가능해진다.

에어포트 익스프레스에는 숨어 있는 기능이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에어포트 익스트림 베이스 스테이션의 무선 범위를 늘여주는 브릿지로 활용하는 기능인데, 장애물이 많아서 에어포트 익스트림 베이스 스테이션이 잡히지 않는 사각 지역을 커버하기 위해 에어포트 익스프레스를 쉽게 추가할 수 있다.

향후 아이북·파워북과 같은 노트북이 아니라 좀 더 경량 장치로 에어포트 익스프레스에 음악을 전송할 수 있는 장치가 나온다면 미디어 생활 수준을 한 단계 더 높이는 도화선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결론
이번 원고의 탈고가 끝날 무렵에 윈도우 XP 미디어센터 심포니가 10월에 공개된다는 기사를 접할 수 있었다. 비디오 부문의 헤게모니 싸움에서 거실을 점령하기 위해 MS와 중견 PC 업체들이 전력을 다하고 있는데, 애플은 비디오 부문에는 별다른 관심을 표명하지 않고 그 대신 아이튠즈, 아이포드, 애플 온라인 뮤직 스토어, 에어포트 익스프레스를 앞세워 소리 소문 없이 오디오 부문에서 야금야금 영토를 넓혀나가고 있는 중이다.

왜 애플은 다른 회사가 눈독을 들이고 덤벼드는 비디오 부문을 제쳐두고 음악 부문을 공략했을까? 역시 대답은 ‘선택과 집중’으로 귀결되는 모양이다. 인터뷰 중에 미디어 센터 시장에 관심이 없느냐는 질문을 받고서 스티브 잡스가 대답한 내용 일부(?)로 마무리를 짓겠다.

“아무리 좋아하는 영화이더라도 수천 번 볼 수는 없습니다. 다섯 번이나 보면 많이 볼까요? 그러나 좋아하는 노래라면 수천 번을 들어도 좋죠. 따라서 영화와 음악은 정말 성격이 판이합니다.” @
홈네트워크와 유비쿼터스 시대에 가장 적합하다고 주목받아온 새로운 무선 네트워크 기술인 ‘지그비(Zigbee)’가 내년부터 상용화될 전망이다.

 8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삼성종합기술원, 한국무선네트워크, 전자부품연구원, 에스디시스템, 팬택, 오렌지로직 등이 대거 관련 제품을 개발하고 이의 상용화를 추진하고 있다.

 삼성종합기술원은 2.4GHz, 900MHz 무선(RF) IC를 개발한 데 이어 2.4GHz 물리층(PHY) 칩을 개발중이며 프로토콜 스택 등 소프트웨어 개발까지 완료했다. 삼성종합기술원은 CPU와 RF IC를 1칩화한 제품을 내년 4월 출시키로 했다. 삼성전자의 한 관계자는 “지그비 표준에 삼성에서 제안한 3개의 네트워크 기술이 채택될 정도로 표준화를 주도하고 있다”며 “지그비의 경우 홈 네트워크 분야에 표준 기술로 부상할 가능성이 높아 전사에서 관심을 갖고 상용화를 추진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무선네트워크는 지그비 프로토콜 스택과 지그비 모듈을 선보였다. 이 회사의 정윤성 이사는 “해외 통신칩 업체들과 소프트웨어를 제공하는 것에 대해 협의중”이라며 “팬택과도 지그비 폰 개발에 함께 참여하는 등 국내 휴대폰 업체들과 협력을 강화해 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전자부품연구원은 지그비 칩세트를, 에스디시스템은 지그비 기술을 적용한 홈 오토메이션 기술을 선보였다.

 이와관련, 8일 개최된 지그비얼라이언스 한국총회에서 밥 하일 회장은 “연내에 지그비 1.0 표준을 최종 확정할 예정”이라며 “표준 확정 후에 제품개발, 인증 등을 획득하는 절차를 거치게 되면 이르면 내년 4월부터 지그비 규격을 만족하는 상용제품이 출시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그는 “다른 홈네트워크 기술과 달리 지그비는 회원으로만 가입하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로열티 프리(free) 기술’이라며 “한국 업체들도 표준확정에 많은 기여를 했으며 홈네트워크 도입이 가장 빠른 한국에서 시장이 확대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지그비란=블루투스에 비해 전송 데이터 양은 적지만 하나의 배터리로 1년을 사용할 정도로 저전력 규격이며 소프트웨어, 관련 부품들을 최소화해 원가가 블루투스의 2분의 1에 그치는 등 제어와 센서를 기본으로 하는 홈 네트워크에 적합한 무선 통신 기술이다. 또 수백개를 네트워크화하는 데 그친 블루투스와 달리 수만개의 제품을 네트워크화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한편 SK컨소시엄은 내년에 진행하는 2차 디지털홈 사업에 지그비 플랫폼 도입을 추진중인 것으로 알려졌다.Zigbee






100만원으로 창업… 10년 후 33조원 회사로 키워
`델컴퓨터’ 마이클 델 회장 / 39세

34세에 미국 5대 부자로 꼽혀… 중간유통 생략한 조립형 맞춤 PC로 ‘대박’ 터뜨려



미국 델컴퓨터사의 마이클 델(39) 회장은 말 그대로 ‘초고속 인생’을 살고 있다. 1000달러(약 110만원)를 가지고 회사를 차린 것이 19세였다. 그후 5년여 만에 회사 규모는 3억8900만달러로, 그로부터 10년 뒤엔 300억달러(약 33조원)로 덩치가 커졌다. 같은 기간 회사 주식은 7만9000% 뛰어 올랐다. 포브스지(誌)가 선정한 세계 500대 부자에도 가장 어린 나이(27세)에 선정됐으며 34세에 미국 5대 부호에 뽑혔다. 우리나라라면 수능시험 치르고 막 시작된 캠퍼스 생활을 만끽할 나이에 벌써 ‘사장님’이었던 그는 1965년 2월 미국 텍사스주에서 태어난 이제 서른아홉의 ‘386’이다.


그의 인생은 어린 시절부터 초(超)고속적 요소가 내재해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이던 1973년의 일이다. 집에 배달된 잡지 뒷면의 “간단한 테스트 하나만 통과하면 고등학교 졸업증서를 취득할 수 있습니다. 지금 도전하십시오!”라는 광고에 그의 눈길이 꽂혔다. 딱히 학교에 대한 반감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곧장 우편으로 테스트를 신청했다. 그후 어느 이른 저녁 테스트 회사 직원이 휴스턴에 있는 그의 집 문을 두드렸다. 그녀는 “마이클 델”씨를 찾았다. 뜻밖의 손님을 맞은 그의 어머니는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몇 가지 대화가 오간 뒤 곧 상황을 이해하게 됐다. 어머니는 “지금 샤워 중인데 곧 불러드리죠”라고 말했다. 이윽고 붉은색 목욕가운을 걸친 8살짜리 꼬마가 나타났을 때, 그 직원은 무척이나 놀랐다. 델 회장은 자신의 저서 ‘다이렉트 경영(Direct from Dell)’에서 “어릴 때부터 나는 무엇이든 불필요한 단계를 제거하는 일에 상당히 흥미가 있었다”고 적었다.


그의 사업가적 기질도 어릴 적부터 자란 것으로 보인다. 증권 중개인이던 어머니 덕에 유년시절인 1970년대 델의 가족 식탁에서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의장이 무엇을 했고, 그것이 경제와 인플레이션 수치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으며, 어떤 회사에 투자하고 어떤 주식을 사고 팔아야 하는지 등이 대화 주제들이었다. 그 중 어린 델의 머릿속에 오랫동안 남았던 단어는 ‘상업적 기회’. 델은 열두 살 때 이미 ‘상업적 기회’를 포착해 실제 돈벌이에 성공한 적이 있다.







12세 때 우표중개로 2000달러 벌어


당시 우표 수집에 몰두했던 그는 집에서 두 블록 떨어진 중국음식점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우표 수집에 필요한 돈을 모으고 있었다. 경매를 통해 우표를 구입했던 그 시절, 우표 가격이 오르자 어린 델은 우표 중개인들의 역할에 관심을 갖게 됐다. 불필요한 단계를 생략하기 좋아하고, 사업가적 분위기 속에 자란 그는 우표 가격 상승과 중개인의 역할 사이에서 ‘기회’를 본 것이다. 결국 그는 우표를 사기 위해 중개인들에게 돈을 지불하느니 내가 직접 중개에 나서는 편이 더 낫겠다는 생각에 이르렀고, 즉각 이를 행동에 옮겼다. 그는 이웃 사람들에게 그들의 우표를 자신에게 맡겨줄 것을 부탁했다. 우표잡지 ‘린스 우표저널’에 ‘델의 우표’라는 광고를 실었다. 그는 우표 경매상으로 당시 2000달러를 벌어들였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당시 그는 이제 ‘열두 살’이었다. 하지만 델 회장은 2000달러라는 돈보다도 중개인을 거치지 않을 경우, 훨씬 더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점이 더 소중했다고 그 당시를 회고했다.


델에게 컴퓨터와의 운명적 만남이 찾아온 것은 열다섯 살 때인 1980년이었다. 학교에 있던 최신 텔레타이프 단말기 조작에 성이 차지 않던 그는 본격적으로 컴퓨터 가게를 어슬렁거리며 컴퓨터를 주무르기 시작했고, 정기적으로 간행되던 컴퓨터 잡지를 두루 섭렵했다.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그는 결국 고전적인 떼쓰기 전법으로 부모님을 졸라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애플’ 컴퓨터와 생의 첫 만남을 갖게 된다. 그러나 정작 컴퓨터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가 한 일은 컴퓨터를 켜고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새 컴퓨터를 분해하는 일이었다. 부모님으로부터 엄청난 꾸중을 들어야 했다.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비싼 돈들여 사주자마자 ‘파괴’라니…. 하지만 델 회장에게 컴퓨터 분해는 대책 없는 파괴가 아니라 미지에로의 탐험이었다. 컴퓨터 몇 대를 못쓰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이 어떻게 작동되는지 살펴보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컴퓨터를 직접 해부 조립하는 당시 델의 체험은 컴퓨터 기업 델의 성공요인인 직접 조립 후 판매 방식의 뿌리가 된다.


그후 그는 의사가 되기를 바라는 부모님의 권유로 오스틴에 위치한 텍사스대에 진학하지만 학교로 떠나는 그날 그의 차 트렁크에는 3대의 컴퓨터가 실려 있었다. 그의 대학생활은 낮엔 수업을 듣고, 밤엔 컴퓨터를 업그레이드 하는 일과의 반복이었다. 컴퓨터광이라는 그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서 그 지역의 변호사나 의사들이 자신들의 컴퓨터를 맡기기 시작했다. 컴퓨터 판매 라이선스를 취득해 텍사스주의 공개입찰에 참여하기도 했고, 실제로 입찰을 따내기도 했다.


그러나 아들의 학점이 형편없고, 수업도 곧잘 빼먹는다는 소식을 접한 부모님은 급기야 그의 기숙사로 찾아왔다. 방안에 가득찬 컴퓨터 부품들을 보신 아버지는 “이런 컴퓨터 따위는 당장 집어치우고 학업에 전념하라”고 다그쳤다. “도대체 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 넌 도대체 뭐가 되고 싶은 거냐”고 소리쳤다. 그에 대한 델의 대답은 “저는 IBM과 경쟁하고 싶어요”였다. 이듬해인 1984년 5월 델은 대학을 중퇴하고, 거대기업 IBM과의 경쟁을 위한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한다. 당시 투여된 자본금은 단돈 1000달러였다.


매출액 해마다 50%씩 성장








▲ 델컴퓨터의 '맞춤' PC는 소비자에게 자신이 원하는 부품과 스타일의 PC를 제공. 만족도를 높였다.
회사 설립 직후 그는 ‘직접 마케팅(Direct Marketing)’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시장 공략에 나섰다. 3000달러짜리 컴퓨터를 중개업자를 통하는 대신 부품을 별도로 직접 구입해 조립하면 그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었던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전략이었다. 쉽게 말해 중간 유통 과정을 생략하고 소비자로부터 직접 주문을 받아 조립한 ‘맞춤 PC’를 저렴하게 판매하겠다는 것이다.


이 직접 마케팅은 여러가지 면에서 혁명적 요소를 갖고 있었다. 우선 중간 판매상의 개입을 없앰으로써 기업이나 고객 모두 비용을 줄일 수 있다. 다른 회사들은 주문을 받기 전에 미리 컴퓨터를 만들기 때문에 고객이 원하는 컴퓨터를 추측할 수밖에 없지만, 델은 고객의 주문에 따라 컴퓨터를 구성하기 때문에 시장의 요구를 실시간 단위로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이는 공급자 입장에서는 고객이 원하지도 않는 쓸데없는 재고로 인한 비용을 줄일 수 있는 장점이 있었고, 소비자 입장에서는 자기가 원하는 부품과 스타일에 따라 만들어진 컴퓨터를 구입할 수 있으므로 그만큼 만족도가 높을 수밖에 없는 이점이 있었다.


당시로선 획기적인 이 발상은 PC업계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IBM, 컴팩, HP 같은 메이커 PC보다 평균 20% 가량 저렴한 델사의 PC는 소비자들의 열렬한 갈채를 받았고, 델컴퓨터의 매출액은 매년 50%씩 성장하기 시작했다. 1988년 처음 미국 증시에 상장할 때 1억5900만달러에 불과했던 델의 매출액은 2001년 무려 310억달러로 치솟았고, 2004년 현재까지 불경기를 모르고 고도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11월 19일 영국 경제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FT)가 발표한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재계 리더 명단에 여섯 번째로 자신의 이름을 올려놓은 델 회장은 이처럼 놀라운 성장에 대해 “위대한 출발”이라고 정의내렸다.


컴퓨터 시장 점유율 세계 1위 기업을 브레이크 없이 초고속도로 이끌어온 그에겐 이 정도 성공이 위대하긴 하지만, 아직 출발에 불과한 것이다.


최승호 조선일보 국제부 기자(river@chosun.com)


----------------------------------------------------------------------
10년 전 쯤 엄마가 마이클 델의 이야기를 듣고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도 컴퓨터 한 번 분해해 보렴."
당시에 computer programming을 막 시작했는 데,
내 생각에 컴퓨터는 Software적인 물건이라 Hardware를 많이 들여다 봐도 별 소용없었다.
델은 하드웨어 판매 업자지만 내 꿈은 프로그래머였으니까.

진지함

2004. 12. 10. 23:42 | Posted by 속눈썹맨

글쎄 나는 어떤 사람일까? 지나치게 진지한 사람인 것 같다.
누군가는 비슷한 뜻으로 '끈질긴 사람'이라고 말했다.
한 번 시작하면 좀채로 멈추질 못한다.
그러다가 그만두면 다시는 하지 않는 것도 많다.
너무 진지하고 무겁게 세상을 산다.
고민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재보고 또 재보고 분석하고.


초등학교 1학년 때 태권도를 1년간 다녔었는 데,
그 때는 내가 정말 무도인이라고 생각했다.
평생 하루에 한 시간은 이 운동을 한다는 생각으로 살았다.
지각도 절대 안하고 한겨울에도 얇은 도복 한 겹만 입고 다녔다.


어느날 부터 그냥 태권도가 싫어졌다.
그래서 절대로 다시는 도장에 들어가지 말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대신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했다.


3학년 때 다니던 컴퓨터 학원도 비슷했다.
수업이 5시에 있으면 4시에 가서 기다렸다.
왜 그리 일찍 갔는 지 모르겠다.
공부하는 사람은 그런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때는 골수까지 선비라고 생각했다.)


한 번 아니라고 하면 절대 아니고
아무리 손해를 보고 바보 같아도 일관성을 버리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학교시험이나 수학, 과학 문제를 풀 때도 그랬다.
진지함을 넘어서 강박에 이르렀다.
내 목표는 60분짜리 시험문제는 무조건 30분에 푸는 거였다.
30분만에 다 풀고 30분 동안 한 번 더 푼다.
그렇게 하면 실수는 거의 없어진다.
고등학교 때까지 시험 시간이 원래 부족한 경시대회가 아니라면
학교 시험에서 실수를 해서 틀린 문제는 거의 없는 것 같다.
사실 이 나라의 주입식 교육이 그런 것 인데,
적어도 수학, 과학에서는 이 나라 교육의 모범이었던 것 같다.
중학교 3년간 나를 잘 아시는 한 선생님은 나를 '컴퓨터'라고 불렀다.
칭찬이라고 하신 말씀인 것 같은 데, 생각해보면 정말 계산하는 기계였다.


반대로 영어는 정말 싫었다.
수업 시간외에는 절대 책을 펴보지도 않았다. 거의 포기하고 살았다.
그러고보면 난 참 극단적이고 급진적인 사람(매파)이다.


대학 2~3학년 때부터 많이 온건한 사람(비둘기파)이 된 것 같다.
사회 생활하면서 더 그렇다.


초등학교 때처럼 살았다면 아마도 육사에 들어가서 FM 군인이 됐을 테고,
(2차 대전 일본에서 태어났다면 가미가제 특공대가 됐으려나?)
고등학교 때처럼 살았다면 학위받아서 무슨 연구소에 들어가 있었겠지.
하지만 인생이 그렇게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
고집은 꺽이기 마련이고, 새로운 기회와 환경은 사람을 바꾼다.










직장 3년차 평균 연봉인상률 27.4%
[edaily 2004-12-09 11:24]




[edaily 문영재기자] 신입직 초임 대비 경력 3년차 평균연봉 인상률이 27.4%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광고기획, 헤드헌터, 경영기획·전략, 게임프로그래머 등의 직종이 경력이 쌓일수록 다른 직종에 비해 비교적 연봉 인상폭이 컸다.

9일 채용정보업체 잡코리아에 따르면 신입직과 경력 3년차 채용공고 3만109건의 연봉수준을 분석한 결과 4년제 대졸 남자기준으로 신입 평균 초임연봉(1851만원)과 경력 3년차(2359만원)간의 평균 연봉인상률은 27.4%, 연봉인상액은 507만원으로 집계됐다.

직종별로는 `광고기획직`의 경우 신입 평균연봉 1904만원, 경력 3년차 평균연봉 2867만원으로 경력에 따른 연봉 인상률은 50.6%(963만원)로 가장 높았다.

이어 `헤드헌터직`이 신입 평균연봉 2100만원, 3년차 평균연봉 3011만원으로 인상률 43.4%(911만원)를 기록했고 `경영기획·전략직`의 신입 평균연봉은 1919만원, 3년차 평균연봉은 2740만원으로 42.8%(821만원)의 인상률을 나타냈다.

`게임프로그래머직`은 신입 1938만원, 3년차 2714만원으로 인상률이 40.0%(776만원)였으며 `캐릭터·애니메이션디자인`은 신입 1692만원, 3년차 2344만원으로 경력에 따른 연봉 인상률이 38.5%(652만원) 정도였다.

이외에 신입직 초임 대비 3년차 평균연봉 인상률이 높은 직종으로는 `광고영업` 36.3%(1727만원→2355만원), `홍보·PR` 35.8%(1768만원→2400만원), `무역·해외영업` 34.6%(2282만원→3072만원), `마케팅·영업기획` 34.0%(1855만원→2485만원), `웹디자인` 33.7%(1730만원→2312만원), `웹마스터` 32.0%(1789만원→2361만원), `연구개발` 31.9%(2336만원→3081만원) 등 전체 평균 인상률에 비해 비교적 높은 직종으로 나타났다.

반면 `운송·택배·배송직(8.8%)`이나 `외식·숙박서비스직(9.3%)`, `생산·기능직(13.0%)` 등은 다른 직종에 비해 비교적 경력에 따른 연봉 인상률이 낮았다.

한편 경력 3년차 연봉이 가장 높은 직종은 `연구개발직`이 3081만원으로 나타났으며 `무역·해외영업` 3072만원, `투자·분석` 3060만원, `헤드헌터` 3011만원, `광고기획` 2867만원, `경영기획·전략` 2740만원 등의 순으로 집계됐다.

------------------------------------------------------------------
내년이면 나도 3년차가 되는 군..











착시 이용한 초현실주의 작품 인기
미디어다음 / 서영석 통신원







'The sunsets sail', 롭 곤살베스 作

착시 현상을 불러 일으키는 초현실주의 화가의 그림이 네티즌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착시 현상 카페(cafe.daum.net/soojungvv) 등 그림 관련 카페나 개인 블로그에는 그의 상상력 넘치는 그림에 대해 '신기하다', '어느 것이 현실인지 모르겠다'라는 반응과 함께 그림에 대한 갑론을박의 리플이 넘치고 있다.

현실인지 비현실인지 구분하기 모호한 공간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키는 이 그림들의 주인공은 캐나다 출신 화가 롭 곤살베스(Rob Gonsalves). 의인화된 해바라기를 청중으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악사, 옥상위의 기타리스트를 청중마냥 내려다보고 있는 복층의 집들, 빙판길인지 밤 하늘인지 구분하기 힘든 공간을 유영하는 스케이트 타는 사람들 등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 그의 그림 속에 펼쳐진다.
1959년 토론토에서 태어난 곤살베스는 12살 때부터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고 16살 때 초현실주의파인 달리(Salvador Dali)와 탕기(yves Tanguy)를 접하며 정식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Nocturnal skating', 롭 곤살베스 作

1990년 토론토 야외 예술 전시회를 통해 자신의 첫번째 전시회를 연 이 화가는 무의식의 발현을 모토로 하는 일반적인 초현실주의와는 달리 정교한 계획과 의식적인 화면구성으로 엮어내는 자신의 작품세계를 매직 리얼리티(magic reality)라고 설명하고 있다.

공간 착시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장면의 사실적 묘사, 수학적 개념의 도입은 에셔(Maurits Cornelis Escher)나 마그리트(Rene Magritte)와 같은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나 그의 그림에는 기존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작품에 비해 시각적 불편함과 공포가 없다는 점에서 대중적이라는 평가와 함께 해외 저명인사들의 수집품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고양시 문화재단 어울림 미술관 큐레이터 김언정씨는 "곤살베스의 작품들은 동시대의 대중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으며 꿈꾸듯 환상적 순간들이 지배한다. 초현실주의 착시현상에 입각해 표현한 그의 기발한 상상력은 그림을 통해 한편의 마술을 감상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고 말했다.

곤살베스 작품 판매상의 양해를 구해 그의 작품 중 일부를 소개한다.








'Listening Fields', 롭 곤살베스 作
.







'Here Comes The Flood', 롭 곤살베스 作
.







'High park pickets', 롭 곤살베스 作
.







'The Performer and his Public', 롭 곤살베스 作
.







'The mosaic moat', 롭 곤살베스 作
.

[기사]애플-MS「GUI 경쟁의 역사

2004. 12. 10. 14:41 | Posted by 속눈썹맨
지난 글에서는 기술 유전자에 대해 주로 서술했다. 이 기술 유전자라는 것은 실체는 없으나 걸출한 인물들과 그들의 성취가 유전자처럼 하나의 기술 양식으로 자리잡은 것을 말한다. 지난호의 NT뿐만 아니라 윈도우나 다른 기술들도 마찬가지다. 윈도우나 GUI(Graphic User Interface)의 개념도 MS에서 처음 나온 것이 아니다.

윈도우의 가능성을 세상에 처음 보여준 사람은 더글라스 엥겔바트(D. Engelbart)라고 볼 수 있다. SRI(Stanford Research Institute)에서 엥겔바트는 1969년에 사람들이 깜짝 놀랄만한 그래픽 인터페이스(Graphic Interface)를 선보였다. 하나의 대확장이었던 셈이다. 엥겔바트의 시스템 공개 이후에 윈도우와 GUI는 사람들의 관심 대상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엘겔바트에게 DARPA(Defense 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의 연구비를 제공했던 책임자인 밥 테일러는 제록스 PARC(Palo Alto Research Center)로 옮겨가 그곳에서 연구를 지휘하게 되었다.

마우스와 그래픽 화면으로 연상되는 GUI 환경은 처음부터 사람들에게 환영받은 것은 아니다. 당시의 컴퓨터 연산능력과는 괴리가 너무 심해서 80년대 초까지도 그래픽 시뮬레이션은 수퍼컴퓨터를 이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PC나 일반적인 마이크로 환경에는 아예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당시로서는 생각이 앞서간다는 사람들이 GUI 환경의 운영체제를 이야기하고 있을 때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는 생각으로 이들을 쳐다보았다.

스티브 잡스나 다른 사람들이 처음부터 윈도우 환경의 가능성을 알아보았다는 회고와는 달리 개발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회고는 다르다. 스티브 잡스에게 그래픽 사용자 환경의 중요성을 설명하느라고 무척 애를 먹었다는 것이다. 매킨토시의 아버지라고 알려진 것과 달리 스티브 잡스는 텍스트 환경에 더 집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Aplle III라고 알려진 ‘LISA’의 개발에서도 잡스는 처음에 텍스트 환경을 고집하고 있었고 매킨토시의 기획자였던 제프 라스킨(Jef Raskin)의 설득을 듣고 난 후에 그래픽 환경의 옹호자가 되었다고 한다.

GUI라는 측면에서 직관적인 인터페이스의 중요한 도구인 마우스는 1960년대에 개발되었는데, 이 역시 엥겔바트가 발명했다. 마우스 역시 초기에는 그렇게 탐탁치 않게 생각되는 물건이었다. 정작 창시자인 엥겔바트조차 마우스를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보았다. 마우스가 양손 사용의 장점을 지나치게 빼앗는 데다 손에 지나치게 많은 부담을 준다는 게 이유였다. 오히려 엥겔바트는 손목을 이용하는 마우스보다는 무릎을 이용한 인터페이스가 더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매킨토시의 초기 구상자였으며 매킨토시 개발팀을 직접 선발한 제프 라스킨도 마찬가지로 마우스를 효과적인 인터페이스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라스킨은 키보드에 집착했으며, 효과적인 키보드 인터페이스야말로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다.

GUI가 구현된 최초의 컴퓨터, 제록스 스타
요즘은 당연히 여겨지는 그래픽 환경의 UI가 70년대 당시로서는 대단히 생소한 개념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제록스의 PARC에서는 ‘스타(Star)’라고 하는 워크스테이션과 운영체제들이 이미 70년대 후반부터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고, 사실상 이들은 엥겔바트가 구현하려고 했던 UI와 크게 다른 것이 아니었다. 제록스의 스타는 흑백이긴 하지만 대단히 높은 해상도의 그래픽을 구현할 수 있었고 우리가 알고 있는 윈도우 환경의 중요한 개념들을 모두 구현한 것이었다.

제록스의 PARC에는 세계 최강의 컴퓨터 과학자들이 모여 미래의 컴퓨터 환경을 연구했다. 객체지향 프로그래밍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앨런 케이와 이더넷을 만든 밥 멧칼프, 그리고 인터넷의 전신인 ARPANet을 성공적으로 지휘한 밥 테일러, 포스트스크립트를 만든 어도비의 창업자 존 워넉도 당시 PARC에 있었다. MS의 응용 소프트웨어 분야를 지휘했던 찰스 시모니 역시 같은 시기에 PARC에서 근무했다.









제록스 스타

밥 테일러가 지휘를 맡으면서 차세대 사무실 업무 환경을 위한 인터페이스로 엥겔바트의 환경을 구현하려 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들의 업적이 회사의 방침에 의해 상업화되지 못하자 PARC의 연구자들 중 일부는 회사를 떠나기 시작했고, 이들이 직접 창업하거나 다른 회사에서 개발 업무를 지휘하게 되면서 PARC에서의 업적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제품들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기 시작했다. PARC에서 연구한 결과들은 PARC의 연구진들이 PARC를 나오면서 다른 컴퓨터 업체들에게 차세대의 기술 유전자를 수혈했다.

이를테면 MS로 간 찰스 시모니는 제록스 스타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매킨토시와 윈도우에서 계속 살아있는 것이며, 자신이 스타를 위해 개발했던 브라보(Bravo) 역시 워드를 통해 살아있다고 인터뷰에서 주장한 바 있다. 초기에는 별로 우수하지 않다고 평가받은 시모니의 멀티플랜 역시 기나긴 수정과 개선을 통해 엑셀로 변화했다. 시모니는 프로그램의 개발을 생물체에 비교했다. 지속적인 수정과 개선이 있을 때 그 소프트웨어가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시모니의 주장이었다. 시모니의 주장이 맞다면 엥겔바트의 시스템과 제록스의 스타, 그리고 한때 GUI 환경의 대명사였던 매킨토시는 하나의 생명체 같은 개념으로 오늘날의 Mac과 윈도우 시스템에 기술 유전자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X-윈도우를 사용하는 유닉스 워크스테이션이나 다른 GUI 환경의 플랫폼도 어느 정도는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PARC의 연구진이 직접 만든 것은 아니지만 제록스 스타의 직계 후계자는 아마도 매킨토시가 될 것이다. PARC의 연구진 중에 애플로 간 사람은 앨런 케이(Alan Kay)와 톰 말로이(Tom Malloy)를 포함한 여러 명이 있었는데, 그들이 매킨토시 개발에 직접 참여한 것은 아니지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매킨토시는 당시까지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던 특이한 인물들에 의해 개발되었고, PC 역사에 새로운 획을 그었다. 시장에 퍼스널 컴퓨터가 보여야 할 모습을 보여준 최초의 상품이 Apple II였던 것처럼 GUI를 구현한 최초의 퍼스널 컴퓨터인 매킨토시가 1984년 발표되었다.

세간에는 잡스가 처음부터 매킨토시를 개발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매킨토시팀은 애플 내에서 잡스가 옮겨오기 전부터 존재했다. 잡스가 매킨토시팀으로 오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Apple II의 후속작으로 잡스가 지휘했던 LISA의 실패 때문이었다. 매킨토시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던 사람은 제프 라스킨이었다.

제프 라스킨은 컴퓨터 역사에서도 정말 특이한 이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제프 라스킨은 밥 트리블(Bob Tribble), 브라이언 하워드(Brian Howard), 버렐 스미스(Burrel Smith) 등을 고용하여 매킨토시의 초기 개발팀을 이끌었다. 스티브 잡스는 Aplle II에서 스티브 워즈니악을 몰아낸 것처럼 라스킨을 밀어내고 직접 매킨토시팀을 이끌었다. 라스킨이라는 대단한 개발자는 매킨토시의 개발 초기에 밀려나긴 했으나 그가 주장한 컴퓨터의 어플라이언스(appliance) 같은 철학은 남은 개발자들이 이어받았고 결국 가전제품처럼 사용하기 쉽고 간단해야 한다는 중요한 원리는 매킨토시의 초기 개발에서 일관된 주제로 남아 있었다.

삽질의 시작, 매킨토시와 GUI
만약 집을 짓게 된다면 맨 처음에 할 일은 기초 다지기와 함께 주변에 대한 토목공사일 것이다. 이러한 작업의 첫 시작은 땅을 파헤치는 일(ground breaking)부터 시작되는데, 집이 잘 지어질 것이라는 확신이 없으면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만약 아무도 지어본 적이 없는 집이라면 그 시행착오는 대단한 노력과 열정을 필요로 한다. 매킨토시팀이 처음부터 부닥친 일은 GUI를 위한 기초를 다지는 일이었고 당시로서는 매우 어렵고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었지만, 이들이 개발에 성공함으로써 나중에 나올 퍼스널 컴퓨터의 기본적인 골격이 잡힌 셈이다. 제록스 스타가 이들의 조상이긴 했으나 스타는 대량 생산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제품이 아니었다. 반면 매킨토시는 점차 시대에 뒤지고 있던 Apple II의 대를 이을 상품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명확히 대량 생산을 위한 제품이었다.

일반인들이 구입할 만한 비용으로 생산할 수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직관적이고 납득할 수 있는, 일관성 있는 인터페이스를 제공할 수 있어야 했다. 그것도 당시에 간신히 16비트 프로세서가 나오기 시작할 무렵의 빈약한 하드웨어를 조합해서 성공시켜야 했다. 이들은 새로 나오기 시작한 IBM 호환 PC와의 싸움에서 경쟁할 수 있는 기종을 만들어야 했다.

1986년 출간된 Susan Lammers의 『Programmers at work: Interviews』라는 책은 당시 유명했던 프로그래머들을 인터뷰한 책으로, 1/3 정도는 PARC 출신의 프로그래머, 2/3는 열정과 뛰어난 재능으로 프로그램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사람들이 인터뷰 대상이었다(필자같이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에게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마소에서는 1988년 ‘유명한 프로그래머를 만났습니다’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1년간 연재되었던 글이기도 하다). 매킨토시에 관련된 사람으로는 제프 라스킨과 앤디 허츠필드(Andy Hertzfeld)가 수록되었다. 이 둘을 포함한 불과 몇 명의 팀이 그 전까지는 없었던 새로운 운영체제와 새로운 하드웨어를 새로 만들어야 했다. 그들의 작품이 초기의 매킨토시이다. 이들은 애플 본사의 다른 빌딩에서 독단적으로 매킨토시를 개발하였다(당시의 복잡한 개발 스토리를 참조하기 위해 필자는 www.folklore.org를 더 많이 참고했다).








왼쪽으로부터 앤디 허츠필드, 빌 앳킷슨, 버렐 스미스, 가운데는 제프 라스킨, 아래 두 사람은 스티브 잡스와 수잔 케어이다.

애플은 당시 창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회사로 프로그래머들의 배경도 다양하였다. 초기의 멤버들과 새로 대기업이나 연구소에서 온 인력들이 섞여서 코딩의 스타일이나 개발에 대한 접근 방법도 각각 다양했다. LISA의 하드웨어 개발팀은 DEC나 HP 같은 대기업의 개발자들을 중심으로, 소프트웨어 개발팀은 PARC 등에서 온 개발팀을 중심으로 꾸려졌다.

결국 이들이 만든 LISA는 대단한 제품이긴 했지만 제록스 스타와 마찬가지로 1만 달러의 비싼 가격에다 애매한 수요자 예측으로 인해 판매에는 실패했다(판매 대상을 일반 소비자가 아니라 미니 컴퓨터를 사용하는 계층으로 선정하였으나 이 시장은 IBM이나 DEC 같은 회사들이 이미 선점한 시장이었고 애플은 아무런 경험이 없었다). 사실상 LISA는 네트워크만 빼면 제록스 스타와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제품이라고 평가된다. LISA의 실패는 개발비에서 발목을 잡혔다는 점과 시장의 예측에 실패한 것이다.

LISA의 실패가 있은 후 매킨토시의 초기 개발팀 중에는 LISA에서 경험을 쌓은 사람들이 생겼으며 무엇보다도 일단 작동 가능한 하드웨어를 만들었다는 배경을 가질 수 있었다. 기존의 LISA와 Apple II의 하드웨어를 바탕으로 매킨토시가 탄생하게 되었는데, 소프트웨어도 LISA와 전혀 무관했던 것이 아니다. 매킨토시의 팀원 중에 빌 앳킨슨(Bill Atkinson)은 LISA의 시스템 코드를 담당했던 프로그래머(나중에 MacPaint와 HyperCard를 개발한다)로 나중에 합류했다.

Apple II의 열혈 팬으로 시작해서 나중에 매킨토시 운영체제의 수석 개발자가 된 앤디 허츠필드는 처음에는 매킨토시 개발팀의 지원부서로 합류했다. 허츠필드는 68000이라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16비트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이용한 평가보드를 개발하기 위해 기존의 애플 디스크를 장착하면서 발생한 문제에 대해 조언하는 것으로 개발팀에서의 첫 업무를 맡았다. 그는 우아한 사용자 인터페이스와 멋진 스타일을 남겨 주었다. 그리고 스티브 잡스의 주문에 따라 의도적으로 다른 업체들이 응용 프로그램을 작성하기 어렵도록 설계했다. 버렐 스미스는 하드웨어를 담담했는데, 하드웨어 역시 클론 업체들이 복제하기 어렵도록 의도적으로 설계되었다고 한다.

특명, 하드웨어의 제약을 극복하라
초기의 매킨토시에서 하드웨어의 빈약함은 8비트 시절보다는 덜했지만 우선 프로세서에 그래픽 환경을 위한 소수 포인트 연산 기능이 없다는 사실로 인해 빌 앳킨슨을 포함한 개발자들이 큰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따라서 원이나 사각형을 그리는 데 걸리는 엄청난 시간을 정수연산을 이용한 루틴을 이용해서 절묘하게 풀어나가야 했다. 결국 개발팀은 Hello라는 글자를 찍는 부트롬을 만든 이후 하드웨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정의했다. 마우스의 부착 역시 1981년의 기술 수준으로는 사투에 가까운 일이었다. 화면이 떨리지 않으면서 마우스를 보여주는 기술을 새로 개발해야 했다.

어느 정도 일들이 이뤄지자 오늘날의 윈도우 환경에는 필수적인 데스크탑 애플리케이션들과 컨트롤 패널의 인터페이스가 확립되었다. 그 다음으로는 메모리를 포함한 자원(resiurce)에 대한 제어와 접근에 대한 개념을 정의하고 소프트웨어들을 탑재하는 일이었다. 최초의 중요한 애플리케이션이라고 할 수 있는 ‘Quick Draw’와 ‘워드프로세서’가 LISA로부터 이식되었다. 메모리 맵핑을 위한 중요한 장치인 메모리 매니저의 경우 개발 당시의 프로세서에는 아직 없었기 때문에 개발팀들은 ‘메모리 매니저’부터 개발하여야 했고 이들은 덩치가 큰 애플리케이션마다 일일이 이식될 수밖에 없었다.

최종적으로 매킨토시의 운영시스템(OS)은 ROM에 들어가야 했는데, 문제는 ROM의 사이즈가 64Kb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개발이 진행되면서 점차 ROM의 공간은 비좁아지기 시작했다. 독자들도 알다시피 64Kb라면 요즘의 작은 그림 파일 하나만도 못한 용량이다. 팀들은 이 와중에 검색기(finder)를 새로 고안하여 붙이기도 하고, 모든 프로그램들을 줄여보기도 하는 등 메모리와의 사투를 벌여야 했다. 결국 입수 가능한 메모리 가격과 용량에 변화가 오면서 약간의 여유가 생기기는 했으나 매킨토시가 발매된 이후에도 메모리 문제는 여전히 심각한 것이었다. 램 역시 64kb나 128Kb로는 언제나 부족했다. 시대를 앞서간 대가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결국 모든 일들은 언제나 파스칼로 시작한 코드를 어셈블러로 다시 고치고 프로그램을 줄이는 작업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관성과 안정성을 해쳐서는 안 되었다.












 
개발 초기에 정의된 데스크탑 인터페이스   초기의 매킨토시 인터페이스

이미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으로 인해 애플에서는 잡스의 입지가 좁아져 있었다. 스티브 잡스는 개발 기간 동안에 계속 복잡한 주문을 늘어놓으며 팀원들을 이끌어갔으며, 팀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주었다고 한다. 잡스의 주문이 너무 많아 과연 매킨토시가 개발에 성공할 수 있을지가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잡스는 LISA의 실패를 매킨토시에서 만회하고자 했고, 라스킨이 주장했던 가전제품과 같은 사용의 간략함과 함께 LISA의 성능과 저렴한 가격이라면 시장에서 실패할 리가 없다는 확신도 있었다.







매킨토시 개발자 문서
매킨토시가 출시되자 이러한 걱정들은 기우임이 드러났다. 사람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아름다운 디자인, 직관적인 인터페이스, 놀라운 성능에 더한 일관적인 통일성이 돋보였다. 당시의 주류인 IBM 호환 PC와는 비교할 수 없는 성능이었으며, 세련 그 자체인 매킨토시를 IBM PC에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억지였다. 당연히 많은 수의 매킨토시 사용자 그룹이 생겼다.

사람들이 바라던 PC ‘매킨토시’
IBM PC의 아성을 극복하지는 못했지만 매킨토시는 성공적인 작품이었고 컴퓨터의 미래상을 제시하는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킨토시는 IBM PC의 대세를 꺽을 수는 없었다. 세련되긴 했지만 가격이 비쌌고 다른 업체들의 참여가 사실상 봉쇄되어 있었다. 하드웨어의 클론은 거의 불가능했고, IBM 호환 PC처럼 기술 문서가 공개되어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개발업체로서는 비싼 돈을 내고 복잡한 기술자료를 얻어가야 했으며 개발 툴이 좋은 편도 아니었다. 화면이 예쁘고 세련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으나 반드시 GUI가 아니더라도 업무를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IBM PC 측이 성능은 별로 우수하지 않더라도 써드파티 하드웨어의 활발한 개발 참여로 북적거리는 상황에 비교하면 애플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모두 장악하려 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쓰기는 쉬우나 개발에는 제한이 많은 플랫폼이었다는 사실이 시장의 팽창기에 커다란 병목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잡스가 애플을 떠난 이후에도 개선되지 않았다.

매킨토시가 나온 이듬해 잡스는 자신이 영입한 경영자 스컬리에 의해 애플에서 밀려났다. 잡스는 새로운 회사인 NeXT를 만들고 이번에는 유닉스를 바탕으로 한 워크스테이션(제품명도 회사명과 같다)에 매달렸다. 하드웨어는 매킨토시와 같은 모토롤라의 68000 시리즈로 개발되었고 유닉스 워크스테이션에 멀티미디어를 곁들였다. 매킨토시처럼 세련된 디자인과 UI가 개발되었다. NeXT 역시 많은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으나 사람들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깊은 인상을 준 것은 사실이다. NeXT의 많은 기술적 유전자는 유닉스 기반 운영체제인 MacOS X에 남아 있다.

잡스와 마찬가지로 오리지널 매킨토시의 개발진들 역시 개발 도중이나 개발 직후 거의 회사를 떠나게 되었다. 일부는 떠나고 싶은 마음을 참고 매킨토시의 완성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남아 있었으나 일부는 더 개발을 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회사를 떠나야 했다. 이들이 떠난 이후 매킨토시는 더 복잡한 인터페이스와 불필요할 정도로 많은 변종들이 시장에 출하되었으며, 얼마 후 회사는 혼란에 빠져 연거푸 사상 최대의 적자를 내면서 거의 연명 수준에 들어갔다. 회사는 매킨토시나 초기의 애플 II 같은 새로운 아이템을 내지 못하고 몇 년을 혼란 속에 시달렸다.

GUI의 창시자, 제프 라스킨
지금으로부터 20년전에 나온 컴퓨터로서는 너무나 인상적인 매킨토시의 일관된 인터페이스, 그리고 놀라운 성능의 뒤에는 LISA를 경유한 PARC의 기술 유전자가 들어 있는 셈이다. 아무리 우수한 팀이라고 해도 불과 2~3년 만에 모든 기술을 숙성시키기는 어려운 일이다. 어떻게 보면 세련된 매킨토시의 껍질을 살짝 벗기면 그 안에는 세상을 변화시키려 했던 엥겔바트와 그의 영향을 받은 제록스 PARC의 그림자가 보인다. 이들의 선구적 노력과 말도 안 되는 노력(?)이 없었다면 성숙한 개발곡선은 그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매킨토시가 완전한 오리지널은 아니었고, 또 그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MS의 윈도우 역시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모든 문화사업은 일종의 표절과 모방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제프 라스킨

윈도우와 직접 상관은 없겠지만 필자가 언급하고 넘어가고 싶은 인물은 사실 제프 라스킨(Jef Raskin)이었다. 어떻게 보면 라스킨의 통찰이 매킨토시의 아이디어를 낳았고 잡스가 자신의 방법대로 개발을 밀어붙인 근거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제프 라스킨은 70년대 초부터 스탠포드의 객원연구원으로 있으면서 PARC에서 하는 일을 지켜보았다. PARC에서 진행하던 화면 처리, 키보드의 표준화, GUI에 대한 모든 작업들이 훌륭하다고 생각한 라스킨은 LISA 개발이 비트맵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애플의 경영진들을 설득했다.

라스킨이 1970년대에 주장한 ‘컴퓨터’라는 것은 문자와 그래픽을 함께 쓰면서 가격대는 1000달러 수준으로 정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당시로는 파격적인 생각이었고, 스티브 잡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라스킨은 당시 회장이던 Mike Markkula에게 자신의 아이디어를 설득해가며 매킨토시팀을 이끌었다(한때 애플과 제록스는 제휴관계에 있었고 제록스가 애플 주식의 10%를 갖고 있었던 적도 있었다). 라스킨이 원했던 매킨토시는 잡스의 매킨토시보다 훨씬 더 단순했다고 전해진다.

애플을 떠난 이후 라스킨은 1980년대 들어 자신이 진정으로 구현하기를 원했던 것은 복잡한 기계(machine)이 아니라 간단한 기구(appliance)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회사 이름을 ‘Information Appliance’로 이름지었다. 이 회사가 만들어지고 나서 라스킨이 제일 먼저 한 일은 가장 단순하고 훌륭한 워드프로세서를 만드는 것이었다. 라스킨은 사람들은 몇 가지 조작 이외에는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고, 세상의 많은 일들이 기계보다는 오히려 도구에 의해 주어진 업무만을 처리하면 제대로 돌아간다는 견해를 주장하고 다녔다. 이는 지금은 당연한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라스킨의 자세한 견해는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은 jefraskin.com에서 그의 글들을 읽어보기 바란다. 라스킨은 Human Interface나 Ubiquity 같은 단어에 대해 가장 먼저 개념을 정립한 사람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일을 간단하고 쉽게 만들어 주려고 했던 제프 라스킨은 반대로 매우 복잡하게 살았다. 이력서가 복잡한 것으로는 라스킨을 따라갈 사람이 별로 없을 듯하다. 컴퓨터는 그의 여섯 번째 프로젝트였다고 한다. 그 이전에는 수학, 철학, 음악, 그리고 물리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철학박사를 따기 위해 공부하다가 컴퓨터 사이언스로 석사학위를 따고, 음악박사 학위를 따기 위해 공부하다가 미술교수가 된 후 스탠포드의 인공지능연구실에서 객원 학자가 되기도 했다. 그 후에는 샌프란시스코 오페라단에서 지휘를 하기도 했으며 음악도 가르쳤다. 그럴 즈음 퍼스널 컴퓨터가 나와서 라스킨의 욕구를 자극했다고 한다. 라스킨은 컴퓨터 매뉴얼들이 형편없다는 사실을 알고 애플을 포함한 다른 회사들의 매뉴얼을 써준 적도 있다.

라스킨은 애플에서 그 이전의 경력들을 숨기고 매뉴얼 라이터로 활동하다가 임원으로 승진했다고 한다. 라스킨은 컴퓨터가 대중에게 파고들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파했는데, 그의 견해는 매우 독특했다. 대중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방법은 제품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제품이 성공해서 돈을 많이 벌게 되면 사람들이 그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는 요지의 말을 자주 했다. 불행한 일일지는 몰라도 세상에 메시지를 전하는 길은 돈을 버는 방법 이외에는 없는 셈이다.

라스킨은 단적인 예로 매킨토시를 예로 들었다. 매킨토시 이전에 자신이 아무리 비트맵 스크린이 좋다고 이야기해도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제록스에서 아무리 많은 기사와 글들을 써도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매킨토시가 의외로 많이 팔려나가자 사람들은 써보거나 기계를 구경한 다음 비트맵 스크린과 그래픽의 아이디어를 이해했고, 그래픽과 텍스트가 분리될 필요가 없으며 문자는 그래픽의 다른 예라는 사실과 함께 별도의 하드웨어를 쓰지 않고도 폰트를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돈을 많이 벌면 벌수록 사람들은 그 사람에게 귀를 기울일 뿐만 아니라 포츈이나 월스트리트 저널에 오르내리지 않는다면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며, 그 반대의 경우라면 진실이든 아니든 사람들은 믿으려 할 것이라는 말을 라스킨은 자주 하고 다녔다.

거의 20년 전에 라스킨이 한 말은 지금의 상황에서도 증명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무슨 말을 하든 사람들이 믿고 이해하게 된 인물이 라스킨이나 잡스가 아니라 빌 게이츠나 스티브 발머라는 점일 뿐이다. 필자 역시 라스킨의 글을 읽으며 무언가 머리를 탁 때리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런 말들은 사마천의 사기열전(史記列傳)에서도 종종 현자들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었던 말이었다.

기술의 컨버전스
GUI와 윈도우의 개념은 제록스 스타에서 출발해 LISA와 매킨토시에서 상업화 단계를 거치며 성숙하게 되었다. MS는 1983년에 이르러서야 윈도우를 개발하겠다고 발표하지만 이미 완성단계에 이른 매킨토시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어쩌면 애플이 고가 정책을 버리고 라스킨의 의견처럼 매킨토시를 1000달러 미만으로 보급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매키토시를 발표하고 나서 애플의 경영 혼란기와 거듭된 개발 혼선으로 MS는 몇 년의 시간을 벌었다. MS의 윈도우는 개발하겠다는 발표만 있고 일정이 지연되거나 문제가 많아 ‘VapourWear(실체가 없는)’라는 소리마저 들었다.

그러나 경쟁자들이 너무 많은 시간을 주었기 때문에 MS는 매킨토시보다 완성도가 떨어지지만 어느 정도 쓸만한 윈도우를 개발하기에 이르렀고, 1990년과 1991년에는 수천만 카피가 팔려 나갔다. 사용자들을 MS-DOS에서 벗어나지 않게 잘 요리하면서 정작 MS-DOS가 버전 9.99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냐는 걱정을 시키기도 했지만, MS에도 프로그래머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고 윈도우 95에 이르면서 10년 가까이 끌어온 보호 모드의 프로그래밍도 사용자들에게 보여줄 수 있었다.

10년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둘은 시간이 지나자 대충 비슷해진 것이다. 사람들에게 GUI의 장점을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매킨토시에서 입증된 사실이니까. 필자는 MS의 역사를 살펴볼 때마다 MS가 경영을 잘 해왔다는 측면도 있지만 경쟁자인 다른 회사들의 실수 역시 대단한 수준이라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다. @


http://kangcom.com/blog/naduhy2/?cod=1&isMain=false&opt=12045&rep=read&snu=118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