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늦바람
어느 친구는 나를 보고 늦바람이 불었단다.
지난 20년간 한 번도 스스로 밖에 나가서 놀지도 않고
방에만 콕 박혀서 공부만 하든지, TV만 엄청나게 보더니.
여행 다닌다고 방학마다 싸돌아다니니까.
. 까만 얼굴
태어나서 얼굴이 제일 까맣게 타버렸다.
평생 지하실에 갖힌 사람처럼 하얀 얼굴이나
지나치게 생각만 하고 방에 앉아 있어서 노란 얼굴로만
세상을 살았는 데, 거울을 보고 내 자신도 놀라고 있다.
. 바퀴달린 가방
온갖 물건을 바퀴달린 파란 가방에 쑤셔넣고 덜덜거리면서
다니면 그렇게 신이 날 수가 없다.
바보처럼 뭐 그리 실실 웃고 다니는 지 모르겠다.
길가는 꼬마에게도 손을 흔들고, 버스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에게 일일히 말도 걸고.
덜덜거리는 가방처럼 나도 덜덜거리면서 다녔다.
. 뉴욕을 떠나는 날
뉴욕을 떠나기는 쉽지가 않았다. 아쉽다기보다는 뉴욕이 내 발목을 잡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짐을 다 끌고 지하철로 달려갔다.
5일권도 끝나버려서 1회권을 또 사야했는 데.
이런 젠장 자판기가 지폐도 안 받고 신용카드도 안 받는 단다.
(지폐 넣는 구멍이 없고, 기계는 친절하게 '신용카드는 현재 서비스 불가'라는 메시지를 토하고 있었다.)
동전을 다 털어도 1회권 살 돈이 안된다.
한국이라면 지하철 입구에 있는 사무소에서 지폐를 주면 직원이 표를 팔텐데
여기는 직원이 절대로 표를 안 판단다. 그럼 나보고 어쩌라는 거지;;
계속 불쌍하게 쳐다보니 공짜로 들어가게 해줬다.
(미국도 불쌍하게 쳐다보면 가끔 공짜가 생긴다.)
돈 굳었으니 좋긴 했는 데, 뭔가 이상했다.
반대쪽 레인으로 들어간 것.
흠. 뉴욕지하철 중 어떤 역은 반대쪽 레인으로 가려면 표를 다시 사야하는 데
그래서 완전 망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다행히 건널 수 있었다.
다만 계단이라서 바퀴 가방을 끌고 갈 수 없었을 뿐. 젠장.
간신히 건너서 지하철을 기다리는 데 20분이 지나도 안 온다.
구내 방송으로 재잘거리는 것을 들어보니 공사관계로 내가 타려는 노선은 운행중단. 머피의 법칙이 따로 없다.
지하철 밖으로 뛰어나와 버스를 기다렸다.
겨우 버스를 타고 부랴부랴 시외버스 터미널로 갈 수 있었다.
10분만 늦었으면 그 날은 뉴욕탈출 못할 뻔 했다.
. 공짜버스
미국은 버스든 지하철이든 직원이나 운전기사가 돈을 안 받는 다.
돈을 횡령하는 시비를 막기 위해서인가보다.
(한국 버스나 택시업계도 운전기사와 기업간에 그런 시비가 많이 붙는 다.)
무조건 자판기로 사야하는 데, 가끔 자판기가 고장이라 표를 못 사서 애먹을 때가 있다.
하지만 반대로 더 좋을 때도 있다.
역 바깥에 있는 자판기가 고장이면 역에 들어가지 못하니 낭패지만
버스에 달린 기계가 고장이면 공짜 버스를 타기도 한다.
나 : "저기, 버스 한 번 타는 데 얼마인가요?"
운전기사 : "이 버스 요금기계가 고장이니 공짜로 타세요."
우리나라라면 운전기사가 요금을 받았을 텐데,
여기는 기계가 고장이면 그냥 공짜다.
운전기사가 돈을 받으면 안되는 규정이 있나보다.
. 버스표
우리나라 시외버스나 기차는 대부분 좌석번호가 있는 데,
미국은 좌석번호가 없는 게 많다.
그레이하운드, 앰트렉 모두 좌석 번호가 없으니 아무 곳이나 앉으면 된다.
그래서 가끔은 시비가 붙기도 한다.
표를 잘못 발행한 것인지, 사람이 몰래 탄 것인지가 약간 모호할 수가 있다.
그래서 버스타기 30분 전에 가야할 필요가 있다.
울 나라처럼 버스 출발 직전에 가도 내 자리가 있는 것에 비하면 무지 복잡하다.
더 신기한 것은 그레이하운드의 경우 버스를 타면 표를 그냥 걷어간다.
일단 몰래 버스를 타면 더 이상 눈치를 못 채게 되어 있다.
(울 나라는 표를 반만 쪼개가고 영수증으로 절반을 남겨서 보관하게 하잖아.
그래서 승객들끼리 시비가 붙으면 누구 자리인지 가려낼 수도 있고.)
뉴욕을 빠져나오는 날도 참 황당했다.
버스에 마지막 빈자리가 1개 남아 있었고 마지막 승객이 올라탔다.
당연히 그 승객은 마지막 빈자리에 앉으려고 했는 데,
그 빈자리의 옆에 앉은 아줌마가 이렇게 말했다.
아줌마 : "저기 여기 제 남편 자리거든요."
마지막 승객 : "이봐요. 빈자리도 1개고 내가 마지막 승객인데, 여기가 내 자리지."
운전기사 : "아줌마, 남편은 도대체 어디 간건데?"
아줌마 : "아무튼 내 자리야. 왜냐면 나는 표가 하나 더 있거든."
그러더니 아줌마가 표를 꺼내 보여줬다.
표를 걷었는 데도 여전히 표가 하나 더 있으면 표를 2장 산 것이 맞기는 하다.
운전기사 : "그럼, 아줌마는 2칸 차지하고 갈꺼야?"
아줌마 : "응, 그럴께."
결국 그 남은 표를 운전기사가 걷어가고 아줌마는 2칸을 차지했다.
마지막 승객은 운전기사와 버스회사 직원의 안내로 다음 버스를 탔다.
그런데 남편은 나타나지 않았고 버스도 그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 떠났다.
(남편은 표가 없는 데, 버스 안으로 입장할 수 있었을 리가 없잖아.)
신기한 점은 그 아줌마도 남편이 타지 않았으니 기다려달라는 말도 하지 않고
태연하게 그냥 버스를 타고 갔다.
아줌마가 사기를 친 것인지, 아줌마가 남편을 버리고 그냥 떠난 것인지,
버스회사가 실수로 한 장을 더 판 것인지. 승객 중에 누군가가 표 없이 몰래 탄 것인지.
진실은 알 수 없게 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