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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이 전대미문의 탄핵 사태로 뜨거운 가운데, 비록 이역만리 타향에 있는 국장이지만 이 상황에 속없이 프리메이슨 이야기나 길게 써내려가는 건 좀 아니지 싶다. 이런 이야기에 관심이 무척 많은 국장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은 눈앞에 놓여 있는 현실이라는 점, 그리고 그 정당함을 추구해 나가는 것이야 말로 모든 것에 우선해야 한다는 믿음에는 의심이 있을 수 없다. 다른 모든 관념적이고 지적인 모험들은 결국 그것이 허락될때만 가능한 사치스러운 취미일 뿐이므로.


여튼 그래서, 오늘은 좀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BC 44 년 3 월 15 일.


약 2 천년 후에 벌어진 대한민국의 탄핵 쿠데타와 날짜도 비스무리한 이 날 아침. 로마의 원로원 회의장에 한 남자가 쓰러져 죽어 있었다. 초로의 마른 몸에 머리도 좀 벗겨지고 잘 생기지도 세련되지도 못한 그가 걸쳐 입은 흰색 토가는 수십 군데의 칼 자국에서 흘러나온 피로 온통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로마의 종신 독재관이자 유럽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던 그는 이렇게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










카이사르의 죽음. 19세기 프랑스 화가 Jean-Leon Gerome 작품


그를 죽인 것은 당시 로마의 의회라고 할 수 있는 원로원의 반대파들이었다. 그들은 점점 권력을 강화해 가고 결국 종신 독재관에까지 취임한 그가 공화정을 버리고 왕정으로 복귀하여 스스로 왕이 되려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다. 로마의 공화정은 로마의 긍지이자 이상이며 누구든 혼자 권력을 차지하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친구이자 심복인 브루투스조차 신의마저 져버린 채 야심에 가득찬 독재자 카이사르의 등에 비수를 꽂아 넣었다. 이후 온갖 혼란을 딛고 카이사르가 직접 양자로 삼았던 약관의 옥타비아누스가 사실상 황제의 자리에 올라서게 되고, 이어 로마의 제정은 시작된다... 이게 우리가 대충 알고 있는 카이사르 죽음의 이야기다.


그러나 사실 카이사르라는 사람과 그의 죽음 언저리의 상황은 이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다.


이 이야기에서 얼핏 보이는, '왕이 되려던 독재자 카이사르' 와 '의회로서의 원로원' 이라는 구도는 마치 개인 권력에 문이 먼 야심가와 이를 저지하려는 민주주의 세력의 대립으로 비춰지는 게 사실이다. 따라서 카이사르 암살 사건 역시 독재를 획책하던 카이사르를 탄핵하기 위해 국민의 대변 기관인 원로원이 그 의무를 다했던 것이라는 식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는 현대적 민주주의의 시각에 그 당시의 상황을 대입해 추출한 매우 지엽적인 관점일 뿐이다.


우리는 일단, 독재를 획책했다는 카이사르의 정치적 배경이 실은 민중파로, 당시 직접적인 시민의 의결 기관이었던 민회를 지지하는 입장이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민회는 원로원과는 달리 모든 로마 시민-여자, 노예 등 제외-이 참여할 수 있는 광장의 집회에 가까운 기관으로, 카이사르는 이들, 즉 일반 국민들에게서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한편 원로원 의원은 사실 귀족들에게 독점되어 있는 입장이었고 BC 1 세기, 즉 카이사르의 시대 전후에는 이미 의원수가 600 명이나 되는 거대한 조직으로 팽창해 있었다. 당시 도시 로마의 인구를 고려한다면 대부분의 귀족 집안들이 원로원에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태인 거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와는 달리, 당시에는 귀족이 아닌 일반 시민들로서는 개인적인 신분 상승을 통해 권력을 행사하는 집정관이나 원로원 등의 자리에 도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따라서 민회를 통해 다수 시민들의 뜻을 드러내는 것은 그들의 의견을 정치에 반영한다는 의미에서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물론 민회는 특성상 때로는 감정적이고 선동에 흔들리기도 하지만 '공화정' 의 진정한 정신에 부합하는 모임으로 전통적으로 로마 사회에서 큰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공화정의 보존과 부활의 명분을 소리높여 외치던 원로원은 실은 귀족의 전유물이던 관계로 이런 원로원을 자신들의 대변자인 의회처럼 생각하는 시민들도 거의 없었다.









원로원과 민회는 흔히 권력을 사이에 두고 대립하는 입장을 보였다. 따라서 제정 이전 로마의 권력투쟁은 이 두 집단을 대변하는 주체들의 싸움인 경우가 많다.

자, 이런 배경을 고려한다면 방금 전까지 마치 민주주의를 위한 거사처럼 보여지던 카이사르 암살은 전혀 다른 것이 되고 만다. 결국 암살의 명분이었던 '로마 공화정의 보존' 이 실은 '원로원 권력의 재탈환' 이상의 의미가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암살은 민주주의나 로마 시민의 뜻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원로원의 권력 유지를 위한 실력 행사에 불과하다. 게다가, 카이사르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던 간에-그 진심은 아무도 모른다- 원로원은 민회와 민중의 지지를 받는 국가의 제 1 인자를 감히 백주에 공공 장소에서 살해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카이사르에게 진정 왕이나 황제와 같은 자리에 오르려는 야심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이유는 전제 군주로서 국민을 억압하고 사욕을 챙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귀족들의 거대 집단 권력 기구인 원로원을 견제함으로서 팽창한 영토와 달라진 국내외 정세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본 시리즈 중 '유럽과 로마 제국' 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이후 제정 시대에도 로마의 황제는 기본적으로 프린켑스, 즉 국민 중 제 1 인자라는 의미로 계속 남아 있었다는 점은 '황제' 라는 한자어로 번역되는 로마의 군주가 실제 중국의 황제와는 매우 달랐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설사 명분만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말을 사용한다는 것은 왕을 국민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로 여기는 아시아의 전제 군주국들과는 본질적인 개념상의 차이다. 또 로마의 황제들은 직접 자식들에게 왕위를 계승한 경우도 있지만 핏줄이 전혀 닿지 않는 사람을 능력 위주로 키워 제위를 물려준 경우도 허다했다. 이 역시 여타의 전제 군주국들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다.


암튼 이런 이유로 인해, 카이사르가 죽음을 당한 후 독재자를 처단하고 공화정을 지켜냈다는 이유로 원로원의 쾌거에 환호한 로마 시민들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며칠간의 혼란이 지나간 후 카이사르의 오른팔이었던 안토니우스의 역사적인 연설에 힘입어(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 에 묘사되었으나 사실 여부는 불명) 암살 주동자들은 성난 로마 시민들에 의해 죽음의 위험에 직면하게 되고 결국 로마를 탈출, 이후 대부분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던 것이다.
 






로마의 위대함은 강력한 대제국이었으면서도 놀라울 정도로 관용적이고도 합리적이었다는 데에 있다. 지금 유럽의 대부분이 실은 과거 로마에 의해 정복된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지금 그 로마를 흉폭한 침략자로 미워하는 나라나 민족은 없다. 로마는 2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럽 세계의 모태이자 중심으로 존경받을 만큼, 제국으로서의 진정한 면모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중해 일원과 이탈리아 반도 지역에 한정되어 있던 로마를 지금의 서유럽으로 진출시켜 문명화한 공로자는 바로 독재자라는 이유로 죽음을 당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다. 그는 개인으로도 무척이나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무엇보다도 로마 제국의 전통이라고 할, 그래서 유럽인들에게 아직도 문명의 전달자로 기억되는 로마의 관용과 낙천성, 합리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그의 광대한 정복 사업과 관용적인 정책이 서유럽 문명의 씨를 뿌렸고, 결국 지금 세계를 이끌어 나가는 서양 문명의 뿌리가 된 것이다.









오늘날 서유럽과 남유럽, 발칸반도, 북아프리카, 소아시아 지방을 망라하고 있는 제정 시대 전성기의 로마 영토. 카이사르는 야전 군인으로 직접 원정에 나서 현재의 서유럽에 해당하는 많은 지역을 확보했다.

... 국장은 노무현 대통령이 카이사르처럼 뛰어난 인물이라고는 물론 생각지 않는다. 그리고 머 노무현으로 하여금 로마와 같은 위대한 대한제국을 건설토록 하자는 쉰소리를 하는 것도 아니다. 그 옛날 제국의 영광이 빛을 발하던 시대는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갔고, 다시 돌아와서도 안 된다. 그 향수를 현대에 비틀어진 모습으로 재현하려던 무리들, 로마에 필적하는 그릇을 갖고 있지도 못했던 일본과 독일 그리고 이탈리아는 스스로 패망과 괴멸을 겪어야 했을 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다 줬다. 21 세기의 마지막 제국인 미국 또한 시대 착오적인 팽창 및 배타주의 노선을 통해 세계 곳곳에 죽음과 공포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실정이다.


다만 국장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카이사르가 고대 그 시절에 맞는 위대한 제국의 상징이었다면, 우리가 민주적인 투표를 통해 역사상 최초로 선출해 낸 귀족 아닌 평민 대통령 노무현은 이미 개인이 아니라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발전 과정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라는 점이다.


모두 알다시피 지난 1 년간 대통령 노무현의 치적은 카이사르처럼 빛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그는 많은 비판을 받았으며 더러 실망을 안겨주기도 했다. 국장도, 때로 너무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의 말이나 행동에 혀를 찼던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이와 상관없이 평민인 그가 대통령의 자리에 있음으로 하여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여정을 대변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만약 그의 무능이 하늘을 찌른다면 우리 국민이 스스로 그를 권좌에서 끌어낼 것이되, 훨씬 더 무능하고 부패한 원로원은 이 문제에 함부로 개입함으로써 그 역사적 가치를 훼손해서는 안되는 거다. 대부분의 일반 국민들이 느끼고 있는 이런 노무현의 상징성을 국회가 보지 못하는 이유는 다름아니라 그들이 민주주의의 주체이자 향유자로서의 평민이 아니라 원로원의 귀족들이기 때문이다.









'보통사람의 위대한 시대' 를 내세웠던 이 양반. 15 년이 지난 이제서야, 아직 별로 위대하지는 못하더라도 우리는 진짜 보통사람의 시대를 조금씩 열어가고 있다. 이 사실의 역사적 중요성을 모르는 자는 우리 나라를 이끌어갈 자격이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하여 (강운태 총장의 주장과는 달리) 노사모도 노빠도 아닌 국장은, 그리고 아마도 같은 입장에 있을 우리들 대부분은 귀족 패거리 집단인 원로원이 그를 백주 대로에서 살해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21 세기에 우리가, 작게는 우리 한국에서부터 크게는 세계 전체에 걸쳐, 이루어내야 할 것은 제국의 이상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이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이상을 포기할 수 없다. 2 만불 시대가 설사 좀 더 늦게 오더라도-지금 우리 사회의 선결 과제는 그런 수치상의 GNP 문제가 아니다. 자격미달자들의 리드 하에 천박한 졸부 사회가 되어 버린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급선무다. 제발 정신 좀 차리자- 홍사덕 총무가 우려하듯 이태백과 사오정이 창궐하며 불만 세력을 형성하는 기간이 설사 좀 더 길어진다 하더라도, 우리가 어렵사리일궈낸 민주주의를 엿 바꿔 먹을수는 없는 일이다. 



...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가 꿈꾸는 대한민국도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건국 후 육십년이 지났다고 하지만 영국 민주주의의 기초를 다진 명예혁명은 물경 315 년 전의 일이다. 서두르지 말고 한 걸음씩 가면 된다. 원칙을 잊지 말고, 매일 조금씩 삶에서 실천하면서 말이다.


그러다 보면 로마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제 3 세계 민주주의 건설의 위대한 본보기로 역사에 남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 아닌가. 처음부터 거창하고 처음부터 위대한 게 세상에 어디 있다던. 다 하기 나름인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