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학문 전체의 위기로 바라보고 해결해야”
지난 몇 년 동안 이공계 위기를 둘러싸고 많은 논의가 이루어졌다. 특히 입시철이면 신문이나 방송은 다양한 특집기사와 프로그램을 통해 이 주제를 다루었고, 과학기술계와 어떤 식으로든 관련을 맺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이공계 기피현상과,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과학기술자들의 처지에 대해 한목소리로 개탄했다. 그리고 이 문제에 관한 한, 우리 사회 대부분의 구성원들은 과학기술계의 주장에 공감을 나타냈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지난 60~70년대 경제성장의 주축으로 저임금에 시달리면서도 묵묵히 일한 공장 노동자들과 열사의 땅에서 땀 흘린 중동 파견 기능공을 비롯한 과학기술자들의 노력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공계 위기라는 인식이 사회적으로 널리 확산되어 공감을 불러있으켰다는 점에서는 그동안 이 담론을 생산해 왔던 과학기술계가 성공을 거둔 셈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어떤 변화가 이루어졌을까? 물론 이공계 기피현상을 완화시키기 위한 다양한 이공계 사기진작책들이 제안됐고, 그 가운데 일부는 이미 실시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조치들로 이공계의 ‘위기’가 해결되리라고 믿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동안 이공계 위기를 둘러싼 공론화의 과정이, 이공계 기피현상이 문제가 있다는 것에 대해 사회적 공감을 모으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원인을 깊이 성찰하지 못해 모처럼 마련된 공감대의 토대 위에서도 문제 해결을 위한 근본적인 방안을 모색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대목에서 우리는 그 동안의 이공계 위기를 둘러싼 논의에 대해 두 가지 물음을 던질 필요가 있다. 첫째는 흔히 이공계 기피현상으로 표현되는 위기론이 실제로 이공계만의 문제인가, 아니면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되어 온 기초학문 전체의 위기인가 하는 점이다. 이공계 기피현상의 본질은, 의대나 법대처럼 돈 되는 분야로만 학생들이 몰리는 사회적 풍조와 이를 부추기는 대학교육의 시장화, 그리고 과학기술을 국가 경쟁력 제고의 도구적 관점에서만 바라보았던 경제주의적 과학기술 정책 등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단순히 이공계의 문제가 아니라 이공계 ‘위기’인 것은 바로 이러한 위기적 상황들의 표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극복을 위해서는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해 이공계뿐 아니라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포괄하는 기초학문 전반의 사기진작을 위한 획기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철학과 물리학이 위협받지 않는 대학교육 환경을 유지해야 하고, 과학기술을 경제발전을 위한 도구로 보는 편협한 인식에서 벗어나 건강한 시민문화의 토대로 인식하는 과학정책의 전환이 요구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문제는 그동안의 이공계 위기론이 주로 과학기술계 상층의 관점에서 제기되면서 오늘날 기능공들이 처해 있는 열악한 상황이나 실험실 대학원생들의 처우와 안전 문제 등 함께 짚어야 할 폭넓은 주제들로 확산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가령 이공계 출신자들의 처우 문제가 제기되는 방식을 보자. 이 문제는 대덕연구단지 등 우리 사회에서 상당한 지위를 확보하고 있는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제기되면서 같은 수준의 인문사회계 출신자들의 사회적 지위와 보수 등에 비해 상대적 박탈감을 토로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따라서 그 처방도 정부 관료 가운데에서 이공계 출신자의 비중을 높여야 한다는 식의 주장으로 이어졌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사실이고, 이공계 출신의 공직 진출도 확대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기능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도 전직을 해야 하는 기능공들의 문제, 이공계 대학원생과 교수들 사이의 위계적인 관계와 실험실 안전 등 만성적인 문제들이 제대로 거론되지 못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지나치게 비대칭적이라 할 수 있다.
지난 수년간 우리는 이공계 위기라는 현상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폭넓은 시민들 사이에서 공감대를 확산하는 첫 단계를 거쳤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많은 성과와 함께 한계 역시 드러났다. 이제는 문제를 이공계만의 위기가 아닌 우리 사회가 함께 안고 있는 위기로 성찰하고 그 해결방안을 진지하게 모색하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김동광/ 참여연대 시민과학센터 소장 kwahak@nownuri.net
(이 글은 참여연대의 입장이 아니라 필자의 개인 견해임을 밝힙니다.)
“기업이 먼저 변해야 한다”
청소년들의 이공계 기피현상과 고급 과학기술 인력의 탈이공계 엑소더스는 대학, 연구기관, 산업체 등 모든 영역에 걸쳐서 과학기술계를 총체적인 위기상황으로 몰아넣고 있다. 대학에서는 진학률 감소와 우수 학생들의 대거 이탈로 이공계 대학원이 공동화로 치닫고 있고, 산업체에서는 쓸 만한 인재를 구하기가 갈수록 힘들어진다고 푸념한다. 이대로 가다가는 신기술의 ‘암흑기’가 올 것이라고 우려하기도 한다.
반도체와 LCD, 휴대전화, 자동차 등 주요 수출품으로 지금껏 이 나라를 먹여 살려온 이들이 바로 민간기업에 종사하는 과학기술 인력들이었던 만큼, 산업 현장에 우수 인력이 없다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업계에서는 국내 이공계 대학이 당장 현업에 투입할 만한 기술인력을 길러내지 못했다면서 이공계 대학의 교육 수준과 내용에 문제제기를 하기도 하고, 정부의 대책을 촉구하거나 해외 이공계 인력의 채용에 열을 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기업들의 상황진단과 문제제기가 대부분 맞는다 하더라도,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다. 오늘날과 같이 청소년들의 이공계 기피현상과 위기를 불러일으킨 장본인은 과연 누구이며, 가장 큰 책임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그 원인은 매우 복합적일 수 있고, 보는 이에 따라 견해가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업체들이 그 원인의 상당 부분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가장 큰 책임이 있다는 점이다. IMF 구제금융시대에 가장 먼저 내쫓긴 것이 바로 기업체의 연구개발 인력들이었다는 사실은, 이후 청소년들의 이공계 기피현상을 부추기는 촉매제 구실을 했다. 또한 기업체들이 과연 우수한 이공계 인력들이 마음껏 연구개발에 매진할 수 있도록 환경을 제공해 주는지도 매우 의문스럽다.
물론 민간기업의 연구개발은 수익창출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연구개발의 기본특성에 대한 이해도 없이 항상 목전의 이익과 단기간의 성과에만 집착해 지금처럼 기초기술, 원천기술의 개발에 소홀한다면, 유능한 과학기술 인력들이 설 자리는 갈수록 좁아질 것이다. 더 나아가 장래에 더 큰 이익을 얻을 기회를 스스로 차버리는 소탐대실의 상황에 치닫고 만다. 심지어 “기술은 그냥 사다 쓰거나 적당히 베껴오면 되지, 뭐 하러 힘들게 개발하는가?”라던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처럼 기업 경영자들은 연구개발의 중요성과 과학기술의 가치에 무지한 것이 우리의 솔직한 현실인 것이다.
트랜지스터, 반도체 집적회로, 나일론 등 세계 최초의 새로운 과학기술이 주로 민간기업에서 나왔던 미국이나, 기업체의 평범한 연구원이 연구개발에만 매진해 노벨상까지 받게 되는 일본의 경우를 비교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그러나 국내 기업들이 ‘연구개발다운 연구개발’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듯하다.
국내 기업들의 이러한 척박한 연구개발 환경은 과학기술 인력을 지속적으로 육성시켜야 할 소중한 ‘인재’로 보기보다는, 싼값에 실컷 부려먹고 용도가 다하면 언제든 폐기처분할 수 있는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풍토와도 직결돼 있다. 백발의 프로그래머나 할아버지 연구원들이 즐비한 선진국과는 달리, 우리 기업의 연구소에서 40대 후반을 넘긴 현역 연구원을 찾아보기는 매우 힘들다.
어떤 이들은 고액 연봉과 화려한 이력을 자랑하는 몇몇 스타급 이공계 출신 CEO들을 들먹이면서 청소년들에게 이공계로 오라고 손짓한다. 하지만 그들은 사실 ‘경영자’로서 성공한 것이지, 연구원이나 엔지니어로서 그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다. 몇만 명에 한 명 나오기도 힘든 스타 CEO보다는, 오래도록 연구개발 현업에 종사하면서 성과와 능력에 걸맞는 대우와 존경을 받는 ‘마스터급’ 연구원들이 기업에 많아질 때 이공계 기피현상은 해결될 것이다.
이공계 박사의 70% 이상이 대학에만 몰려 있다면서, 우리나라 우수 인재들의 지나친 대학 선호 풍조를 개탄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기업 연구소가 오래 머물면서 연구개발을 할 만한 곳이라는 인식을 줄 수 있다면, 대학은 더 이상 우수 이공계 인재의 ‘블랙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30, 40대 초반의 유능한 기업체 연구원들이 뒤늦게 살길을 찾고자 고시공부를 하고 의·치·한의대에 들어가기 위해 수능시험을 다시 보는 국가적인 낭비도 불식될 것이다.
요컨대, 우리 기업들이 그동안 이공계 기피현상과 위기에 상당한 책임이 있는 ‘가해자’였음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반성해야 한다. 과학기술 인력들을 소모품이 아닌 인재로서 대우하려는 ‘윈-윈’ 태도를 가진다면, 장차 이공계 기피현상의 해소에도 큰 실마리를 마련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기업 스스로도 살아나갈 수 있는 상생의 길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