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hani.co.kr/section-004000000/2004/09/004000000200409011015001.html
월스트리트에서 본 한국
그간 다양한 이론과 케이스 스터디를 통해 기업과 경제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MBA 리포트’에 담아냈던 이원재씨가 여름방학 기간 동안 월스트리트 현장의 서머 인턴 과정을 마치며 특별한 글을 보내왔다.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심장부 월스트리트의 사람들 눈에 비친 한국 경제의 참모습은 무엇일까. 편집자주 · · · · · · · · · · · · ·
“지난봄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다음날, 한국 공무원들은 주한 외국인 기업, 투자자들을 하나하나 접촉해 곧 상황이 안정될 것이니 염려 말라고 말해줬습니다. 다른 어떤 아시아 국가도, 이미 선진국이라는 일본까지도 외국인 투자자에 대해 이만큼 신경을 써주지 않습니다. 이곳 투자자들의 한국 시장에 대한 신뢰가 각별한 데는 까닭이 있는 거죠. 그런데 정말 궁금한 건, 한국 사람들 스스로는 왜 그리 자신감이 없는지요? 왜 뜬금없는 경제위기론이 무성한가요?”
여름방학 동안 뉴욕 맨해튼의 금융 리서치회사에서 신흥 시장 담당 이코노미스트와 함께 일하며 돌아본 한국은, 우울증에 걸린 올림픽 꿈나무였다. 주변 친구들이 아무리 격려하고 칭찬해 줘도 두 귀를 꽉 틀어막고는 “나는 이제 틀렸어”라며 자학하는 가엾은 금메달 유망주였다.
■ 비관론의 재생산 구조
“한국이 위기라고들 하는데, 절대 빈곤이 심각할 정도로 늘어나고 있습니까? 실업률이 급상승하고 있습니까? 외환보유고가 바닥이 보입니까?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입니까? 왜 한국 사람들은 미래에 대해 비관적인가요? 원래 애국적인 민족 아닙니까? 좀 이해시켜 주세요.” 함께 일하게 된 이코노미스트는 처음부터 궁금한 게 많았다.
요즘 월스트리트 투자자들은 최근 몇 년 동안 아시아에게 가장 탄탄하게 성장한 한국 사람들이 왜 비관적인지를 매우 궁금하게 생각한다. 함께 일하는 이코노미스트는 중국과 한국을 비교했다. 중국의 빈곤 문제는 여전히 심각하다. 국영기업에서 일하지 않는 종업원들의 ‘숨겨진 실업’ 문제도 언젠가는 구조조정이 시작되면서 터질 화약고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은행들의 부실채권도 여전히 문제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이런 예를 들어 중국이 ‘위기’에 빠져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걱정해 주는 건 오히려 외국인 투자자들이다. 중국인들은 안심시키느라 바쁘다.
그런데 한국은 정반대라는 얘기다. 월스트리트에서는 누구도 심각하게 여기지 않던 위기론을 한국인들이 먼저 퍼뜨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월스트리트도 뒤따라 걱정하기 시작했다. “외국인들만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것 아닌가요?” 한국 투자자들은 항상 외국인 투자자들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지만, 거꾸로 월스트리트는 한국인들의 동향을 가장 관심 있게 눈여겨본다. 한국인들만 아는 숨겨진 비밀을 캐기 위해 한국 뉴스도 찾아보고 한국인들을 직접 접촉하기도 한다. 주요 접촉선은 주로 대기업 임원이거나 정부 고위 관료이거나 가장 많이 팔리는 신문의 기자들이다. 이른바 여론주도층이다.
월스트리트 투자자들이 요즘 만나는 한국인들이 전하는 소식은 거의 저주에 가까운 자학이다. 투자자 입장에서 정서적으로 공감할 수 없을 정도의 심한 위기론을 제기한다. 상상하기 힘든 거친 표현으로 정부를 비난한다. 정부 관료들도 예전보다 자신이 없어 보인다. 한국 주요 신문들의 기사를 봐도 마찬가지다. 시장점유율이 높고 영문 서비스를 하는 2∼3개의 신문을 봐도 내용은 한국 여론주도층으로부터 직접 들은 얘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인 입에서 나온 비관론은 투자자들에게 제공되는 보고서에 그대로 옮겨지곤 한다. 믿을 만한 한국인이 하는 말이니까 보고서에 쓰면서도, 스스로 되묻기도 한다. “믿을 만한 사람들이 다들 정부정책이 좌편향적이라고 하니 그게 맞는 얘기인 것 같기는 한데, 정확히 어떤 정책이 그렇다는 거죠?”
그러니 외신에 등장한 내용이나 증권사 보고서를 보고는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을 보는 시각이라며 대문짝만하게 되받아 보도하는 한국 언론은 사실 우스꽝스러운 짓을 하고 있는 셈이다. 더 우스꽝스러운 건 그렇게 되받아 쓴 대문짝만한 기사를 보고는 외국인들은 ‘한국의 유력 언론이 이렇게 쓰다니 분명 뭔가 있다’면서 다시 깜짝 놀란다는 거다. 물론 웃고 있을 일이 아니다. 이렇게 재생산된 비관론이 어느 순간 부메랑처럼 날아가 한국 경제의 목을 겨누고 있다.
■ 일본도 남미도 아니다
여기 와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최근 몇 년 동안 월 스트리트에서 한국 경제는 떠오르는 동양의 진주였다. 외환위기에 뒤이어 기적처럼 이어진 고속 성장세는 2003년 경제성장률이 3%대로 처지면서 종착역에 다다르는가 싶더니, 올해 다시 5%대 성장률을 예고하면서 탄탄함을 과시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월스트리트에서는 “남는 돈 있으면 무조건 한국에 투자해라. 기다리기만 하면 두 배는 간다”는 말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돌았다고 한다. 정작 한국인들이 망설이는 동안에도 외국인들이 한국 주식을 끊임없이 사들인 이유는 분명했다.
한때 한국은 대만 싱가포르 홍콩과 함께 ‘아시아의 4룡’ 또는 ‘신흥공업국’으로 불리는 걸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긴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누구도 한국을 나머지 3룡과 비교하지 않는다. 고속성장으로 다른 작은 용들보다 덩치가 부쩍 커버렸기 때문이다. 위상이 달라졌다. 외신 기사에서 한국 앞에는 ‘아시아에서 네 번째로 큰 경제’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신흥’이라는 수식어는 사라졌다.
규모가 커졌을 뿐 아니라 산업과 시장구조도 탄탄하다. 전자, 철강, 자동차 등 주요 산업이 해외 시장의 주요 기업으로 포진해 있고 삼성, LG, 현대자동차 등 대표 브랜드는 이미 고급 브랜드로 발돋움하고 있다. 내수 시장을 봐도, 5천만을 넘지 않는 인구로 1억3천만의 일본, 13억의 중국, 11억의 인도에 이어 아시아 네 번째 크기의 내수 시장을 자랑한다. 게다가 컴퓨터, 휴대폰, 초고속 인터넷 등의 시장에서 보듯 단일 상품에 대해 엄청난 수요를 만들어내는 폭발력이 있다. ‘떼거지 근성’은 단점이 아니라 엄청난 장점이었다. 다른 나라에 견줘 국민 대다수의 문화와 소비 수준이 동질적이라는 데서 나온 축복이었다.
수출 전망은 장기적으로 매우 밝다는 게 통념이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자라고 있는 중국과 인도 시장에서 이미 큰 성공을 거두고 있지 않은가. 투자와 관련된 규제는 거의 사라졌다. 게다가 대통령과 경제부총리를 포함해 고위 공무원들이 방문해 열정적으로 투자홍보(IR) 활동을 펼치는 몇 안 되는 나라 가운데 하나다.
월스트리트 투자자들에게는 한국에 일본형이나 남미형 침체가 올 수 있다는 걱정도, 논리를 따지기에 앞서 정서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이다. 일본이 90년대 초 침체에 돌입할 무렵, 투자자들에게 일본은 여전히 폐쇄적이고 신비로운 고속성장 경제였다. 구조조정이라고는 꿈도 꾸기 힘든 분위기였고 모든 결정을 관료집단이 내렸다. 지금 이들에게 한국은 개방되고 시장원리가 관철되고 있는, 훨씬 투명한 경제다.
무분별한 분배정책과 재정 파탄으로 휘청거린 몇몇 남미 국가들과의 비교는 더욱 받아들이기 힘들다. 한국 정부는 경제위기론으로 공격받아 만신창이가 되어서도 여전히 재정 건전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남미식이라면 이미 몇 번은 파격적 분배정책이 나왔을 거다. 한국 언론 보도대로라면 ‘분배를 강조하는 좌파 정부’가 집권했는데도 이 정도라면, 누가 집권해도 남미식 분배정책은 상상하기 힘든 것 아닌가. 남미형 위기가 온다고 호들갑 떠는 바로 그 지면, 정부가 재정적자를 감수하고라도 돈을 풀어 경기를 살려내라고 우기는 바로 그 언론대로라면 말이다.
■ ‘진짜’ 걱정거리들
물론 ‘진짜’ 걱정거리도 있다. 예전부터 월스트리트의 한국 투자자들은 투자위험 가운데 노동 문제와 북한 문제를 가장 위에 꼽았고 여전히 마찬가지다.
△ 이주노 기자 |
남북 대치 상황이 갖고 있는 위험은 심각한 디스카운트 요인이다. 가능성이 낮다고는 하지만, 전쟁은 너무나 큰 폭발력을 갖고 있는 악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해 교전처럼 긴장 고조의 낌새가 보이는 소식에 월스트리트는 매우 민감하다. 하지만 북한 문제는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도, 해결될 것도 아니니 당장 시장에 영향을 줄 수는 없다는 것도 다들 인정한다.
이 밖에 어떤 걱정거리가 있을까? 한국인들이 요즘 투자와 소비가 살아나지 않는다며 내수경기를 걱정하지만, 누구도 한국 사람이나 기업들에게 쓸 돈이 없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미래에 대한 자신감이 없으니 쟁여놓고 있을 뿐이다. 소비자들은 평생 갚아야 할 빚을 끌어들여 비싼 집을 덜컥 사던 자신감을 어느 샌가 잃어버리고, 외식 한 번 할 돈을 아껴 물가상승률보다 낮은 이자를 주는 예금통장에 넣어둔다. 위험한 벤처사업이던 반도체에 엄청난 자금을 쏟아부으며 ‘올인’해 화려한 성공가도를 달리던 삼성전자는 이제 가장 많은 현금을 금고 속에 꽁꽁 쟁여둔 기업이 됐다. 한국 경제를 끌고온 선도적 소비도, 모험적 기업도 사라졌다.
■ 비전을 전파할 것인가, 자학을 전파할 것인가
“미국을 보세요. 한국에서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하루하루 벌어 먹고 삽니다. 그래도 미국인들의 미래에 대한 자신감은 대단합니다. 개발도상국에서라면 국가부도 위기를 몰고올 만한 엄청난 규모의 기업 스캔들이 경제 전체의 위기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빚을 지고 있으면서도 가장 부유한 이유도, 바로 이 자신감 때문 아닐까요?”
월스트리트가 요즘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보다 한국인들의 입에서 나오는 비관론이다. 한국 여론주도층이 전하는 정보는 월스트리트 최고 애널리스트의 분석보다 시장에서 더 큰 권위를 갖는다. 스스로의 미래를 비관하는 정보는 더 큰 권위를 갖는다. 나는 얼마 전, 미국 애널리스트가 한국의 누군가로부터 ‘한국의 위기는 학력 콤플렉스에 찌든 좌파 대통령의 자가당착과 리더십 부족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내게 사실인지를 확인하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외국인 입장에서 한국의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부터 이 정도 이야기를 들으면, 아무리 한국이 좋은 투자 대상이라고 여기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불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세계 자본주의의 심장에서 한국을 보는 시각은 생각보다 단순명료했다. 이익을 잘 내더라도 임직원들이 미래를 비관하는 기업 주식은 사기 싫듯이, 스스로 미래를 비관하는 나라에 투자하기가 꺼려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월스트리트가 한국에서 보고 싶은 건 자신감이다. 물론 한국 경제에 구조적인 문제들이 있지만, 누구도 이 문제들이 해결 불가능하거나 당장 파국을 낳을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학은 파국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거꾸로 말하면, 지금이라도 자신감을 회복한다면 선순환이 시작될 수 있다. 비전을 세우고 자신감을 불어넣어주는, 제대로 된 정치, 제대로 된 언론의 역할이 절실하다. 다들 경제만 생각하자고 하지만,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더 많은 정치를 생각해야 할 때다. 보스턴=MIT 슬론 스쿨 MBA과정 lasttime@freechal.com
* 이원재는 <한겨레>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