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빙으로 치러졌던 미국 대선이 부시 대통령의 재집권으로 끝이 났다. 한국에서도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됐던 이번 선거는 미국의 복잡하고 생소한 선거제도와 정치 지형에 대해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특히 이번 선거에서 나타난 미국 대선의 표면적 양상이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점이 흥미롭다. 대표적으로 시골 지역은 보수적인 성향을, 도시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을 보이는 여촌야도(與村野都) 현상, 오랜 세월 고착화된 지역구도, 젊은 층의 낮은 투표율 등을 꼽을 수 있다. 민주주의가 가장 발달했다는 미국 사회도 표면적으로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유권자 정치지형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민을 통해 건설된 거대한 인종 전시장으로서 미국 사회가 지니는 다양성은 정치 문화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이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이 아닌, 근본적인 정치 풍토는 우리와 큰 차이를 내포하고 있다는 게 현지 한국인들의 분석이다. 미국의 지역주의는 우리 정치에서 나타나는 ‘바람몰이’에 따른 싹쓸이 현상이라기보다는 계급적, 인종적, 종교적 이해 관계가 지정학적으로 반영된 결과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미국 현지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들로부터 들어본 미국의 대선 이야기를 통해 미국 선거와 우리 선거의 닮은 점과 다른 점은 무엇인지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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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DC, 최현미씨 "극명한 지역구도, 젊은층, 고학력자 진보정당 지지 우리와 비슷"
“제가 일하는 직장과 워싱턴 내 분위기는 이번 선거 결과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입니다. 제 주위 사람들은 대부분이 케리 지지자입니다. 우리는 부자, 저학력층 서민, 총기 소지자. 극렬 기독교인 등이 부시를 지지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정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부시를 지지했다는 얘기죠. 이번처럼 미국이 양극으로 분열된 경우는 본적이 없었다는 게 현지 사람들의 얘기입니다. 많은 케리 지지자들은 지금 충격과 놀라움에 휩싸였습니다.”
워싱턴 DC의 안보 관련 연구소에서 일하는 최현미씨는 “직장 내에서 부시를 지지하는 사람을 한 명도 본 적이 없다”며 “선거 후 케리 지지자들은 정신적 공황상태에 이를 정도로 놀라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고학력 직장인들은 모두 케리의 우세를 점쳤고 승리를 낙관했던 탓에 부시의 승리를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
동서부 해안가 등 대도시 밀집 지역은 케리 우세, 중서부와 남부는 공화당이 싹쓸이하는 전통적인 지역구도도 동서로 극명한 대비를 보이는 우리의 정치 지형과 닮은 부분이라고 최씨는 지적했다. 그는 “극명하게 나타나는 지역 구도와 여촌야도(與村野都) 현상을 보면 우리 정치와 미국 정치가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최씨는 또 “부자, 저학력층, 극렬 기독교 신자, 빈곤층에 부시 지지자들이 많다”며 “뜻밖에 히스패닉 등 이민자들 사이에서도 부시 지지자가 상당수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전했다.
"꼭 입다문 보수층도 한국과 비슷" "이민자들 상당수 부시 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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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즈가 발표한 선거 분석 결과 | 뉴욕타임스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케리 지지자의 10%, 부시 지지자의 7%가 히스패닉·라틴계인 것으로 나타났다. 케리와 부시에 대한 지지율에 큰 차이가 없는 셈이다. 아시아계도 케리 지지자의 2%, 부시 지지자의 1%를 차지한 것으로 조사됐다. 전체 아시안계 인구의 3분의 1이 부시를 지지한 것이다.
최씨는 “부자들은 케리가 세금을 더 늘리겠다는 정책을 발표했기 때문에 부시를 지지하고, 저학력이나 가난한 서민층은 그저 미디어가 주입한 부시의 인간적인 매력에 끌린 것 같다” 고 말했다. 최씨는 또 “상대적으로 진보파의 목소리가 크기 때문에 보수층들이 의견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것도 한국과 비슷하다”며 “공개적으로 부시 지지를 밝히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고 전했다.
“요즘은 미국 사회에 테러에 대한 불안감이 매우 높아지고 있어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남쪽으로 이주하고 있죠. 메사추세츠나 뉴욕의 인구는 줄고 유타나 텍사스의 인구가 늘고 있어요. 예전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민주당을 많이 지지했는데 테러에 대한 불안감으로 이번 선거에서는 그런 구도가 많이 깨진 거 같아요”
최씨는 “지역구도를 깨고 민주당 후보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경제, 사회 등의 외적 변수나 개인적인 매력이 필요한 것 같다”며 “케리는 인간적인 매력이나 카리스마가 너무 부족했다”고 말했다. 최씨는 “클린턴의 경우, 쉴새 없이 사람들을 웃게 하고 카리스마가 넘치는 매력을 지녀 ‘천재적인 정치인’이라고 여겨지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예전에는 미국 선거가 끝나면 모든 사람들이 결과를 받아들이고 승리한 쪽도 반대편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분위기였지만 지금은 다르다”며 “이처럼 미국이 분열된 선거는 처음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여론”이라고 말했다.
미시건 주, 박중근씨 "젊은 층 낮은 투표율 우리와 비슷, 미국 지역주의 '바람몰이'와 달라"
"제 주변에서도 부시 지지자를 찾아 보기는 힘듭니다. 미국인인 제 아내의 가족들도 모두 케리 지지자이더군요. 예외가 있다면 아내의 작은 아버지는 부시 지지자인데 이유는 부시가 총기 소지를 허용하기 때문이랍니다. 미국에도 지역주의가 있긴 하지만 한국의 ‘바람몰이’를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이곳 사람들은 지역 바람에 휩싸이지는 않습니다. 아내의 작은 아버지 경우처럼 철저히 자신의 이해 관계에 따라 후보를 선택한다는 점이 우리와 다르지요.”
미시건에서 유학 중인 박중근씨는 젊은 층의 저조한 투표율을 우리 선거 문화와 비슷한 점으로 꼽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미국 젊은이들의 정치 무관심이 훨씬 더 심하다는 것.
“AP 통신에 따르면 18세- 24세 이하의 유권자들의 10% 이하가 투표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젊은 층의 정치 무관심은 더욱 심해지고 있는 셈이죠”
박씨는 미국과 우리의 다른 점으로 철저히 개인적 이해 관계를 반영한 미국인들의 투표 성향을 꼽았다. 한국에서는 지역 바람에 의해 선거 결과가 좌우되지만 미국인들은 실질적인 정책 내용이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 지가 표심을 결정한다는 것.
“베이비붐 세대들은 부시가 전쟁을 통해 연금을 바닥내지 않을까 전전 긍긍하고 있어요. 때문에 자신이 나이가 들어서 연금을 받지 못해 파산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커요. 나이든 사람들이 그런 이유로 케리를 지지하는 경우가 꽤 있었습니다. 총기 소지자들은 총기 수집 문제 때문에 부시를 지지하고. 기독교인들은 낙태와 동성연애자의 결혼 문제 때문에 부시를 지지하는 식이죠. 자신의 이해 관계에 따라 지지후보를 선택하는 유권자 성향이 우리와는 많이 다르더라고요.”
아칸소 주, 김병철씨 “후보 개인의 매력에 의존하는 감성적 투표" "지역구도를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우리와 달라”
아칸소 대학에서 유학 중인 김병철씨는 미국 내 지역구도가 강하긴 하지만 후보 개인의 능력과 매력에 따라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는 점은 우리와 다르다고 말했다.
아칸소는 농업 중심 지역으로 미국 내에서도 시골 지역으로 분류되는 곳. 소득 수준도 다른 주에 비해 낮고 주요 인종 구성도 백인이 대부분이다. 대부분의 중남부 지역이 그렇듯이 이 곳도 공화당 강세 지역이었지만 클린턴 정부 이후부터 민주당 지지자가 많아졌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는 예전처럼 공화당의 승리로 돌아갔다.
“이 곳에서도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이나 소수 인종들은 케리를 지지해요. 그럼에도 최종 결과에서 부시가 승리하게 된 것은 미국인들의 기본적인 성향이 반영됐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시골 사람들 자체가 원래 보수적이죠. 그렇지만 보수적이라고 꼭 공화당을 선택하는 것은 아니에요. 클린턴이 아칸소에서 주지사가 됐던 것처럼 개인적인 매력과 능력만 있다면 보수주의자들에게도 민주당을 선택할 여지는 있는 거죠. 하지만 케리처럼 우유부단해 보이는 인물은 인기를 끌지 못한 것이죠. 또 부시처럼 강력해 보이는 리더가 미국에서는 선호되는 것 같아요. 미국이 다른 나라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타협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미국인들은 바라지 않아요. 미국 대통령이라면 뭔가 우월한 모습, 특별한 지도력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들이 있는 것이죠.”
김씨는 “이번 선거 결과는 미국인 특유의 우월주의와 패권주의가 반영된 결과”라며 “미국인들이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 깊이 파고 들고 따지기보다는 언론에서 보여주는 이미지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쉽게 결정을 내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부시가 이라크 전쟁 등 정책적인 실수가 많았지만 친근감을 무기로 이를 만회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인들의 감성에 호소했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미국 예일대에서 유학생활을 했던 한나라당 남경필 의원은 “지역간 대결구도가 있다든가 젊은층과 고연령층의 지지 성향이 다른 점 등은 우리 선거 지형과 많이 닮았다”고 지적했다.
남 의원은 그러나 “우리 대선에서는 보수파인 한나라당이 졌지만 미국에서는 공화당이 집권했다는 점은 가장 큰 차이를 보인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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