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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성공한 기업 이렇게 시작했다.

2005. 10. 24. 03:48 | Posted by 속눈썹맨









성공한 기업, 이렇게 시작됐다: 포드, 월마트 외





대량생산이란 “표준”을 만든 기업, 포드 자동차(Ford Motor Company)


 


창업자: 헨리 포드 (Henry Ford, 1863-1947)



초등학교 졸업 후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이 싫어 가출, 기계 공장의 견습공이 돼 이후 직공, 시계 수리공, 조선 회사의 직원, 자동차 레이서 등으로 일하면서 자동차 제조 기술 습득, 1896년 혼자 힘으로 자동차를 조립해 냄. 직접 자동차를 만드는 데 성공한 포드는 자동차의 상업적 잠재성을 확신하고 1903년 자동차 회사 설립. 그러나 이미 당시 미국에 자동차 회사는 500개가 넘었음. 포드는 자신의 회사가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대량생산” 밖에 없다는 사실을 절감, 자동차 대량생산 조립 공장을 만드는데 전력을 기울임.


 


조립라인을 완성한 뒤, 포드는 제조 공정의 표준화, 부품의 통일화(그래서 언제든 교환할 수 있도록), 최저임금제를 통한 비용절감에 성공, 자동차 가격을 혁신적으로 낮추기 시작함. 이로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합리적이고 저렴한 가격으로 차를 구입할 수 있도록 한다”는 오래된 목표를 달성함. 이는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의 새로운 혁명이었으며, 오늘날 헨리 포드는 “20세기 대량생산 시스템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얻는다. (그러나 마케팅을 무시한 생산에만 집중된 전략, 기계적 대량생산에 의한 품질 관리 소홀, 단순한 모델에 집착 등으로 포드는 60% 가까이 됐던 자동차 시장 점유율을 점차 잃게 됨.)


 



 



대량생산만으론 먹고 살 수 없다, 고객 서비스의 선구자, 마쓰시다 전기



창업자: 마쓰시다 고노스케 (1894-1989.)



초등학교 4학년 중퇴. 집이 너무 가난해 열 살부터 애를 돌봐 주는 일을 하며 남의 집에 얹혀 살았음. 이후 자전거 수리를 배우고, 전기업체로 옮겨 일을 시작하며 가전제품 업계에 투신. 그간의 경력을 바탕으로 1917년 22살의 나이에 마쓰시다 전기회사 설립.


 


초기 제품인 자전거 램프를 발명해 시장에 내놓았지만 팔리지 않았음. 이에 마쓰시타는 아예 자전거 램프를 자전거 상점마다 무료로 나눠주고 팔리고 나면 돈을 나누어 받는 “외상 직거래” 망을 만들었다. 게다가 사람들이 상점 앞에서 직접 스위치를 조작해 볼 수 있도록 하는 “백문이 불여일견” 마케팅을 창안, 전국적인 히트를 기록함.


 


1925년 내쇼날이라는 상표로 제품 판매 시작, 이때부터 세계 최초의 “고객서비스” 개념 도입. 제품을 팔고 난 뒤에도 수리 반품 등을 책임지고, 물건이 품절되면 소비자에게 사과하고 주소를 적어 빠른 시일 내에 배송을 완료했다. “판매한 후 서비스를 잘해주면 그 사람은 평생 고객이 된다”는 마쓰시타의 기업 철학은 내쇼날 기업이 420억 달러 가치의 세계적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게 함. (1990년에는 미국 헐리웃의 MCA 영화사까지 인수함.)


 


마쓰시타는 헨리 포드의 대량 생산의 방식에 고객 만족 서비스란 개념을 추가, 세일즈에 새로운 표준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1960년에는 업계 최초로 주5일 근무제를 실시해 직원만족이란 개념까지 도입함. (그러나 마쓰시다 전기는 2차 대전 때부터 군사무기 제작에 참여하는 등, 군국주의 기업으로도 잘 알려져 있음.)


 



 



장인정신 하나로 세계를 제패한 기업, 혼다 모터스



창업자: 혼다 소이치로 (1906-1991)



학력이 전무함.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자전거 가게에서 일했음. 16살에 동경의 자동차 수리 견습공으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자동차 업계에 투신. 자동차 수리 전문점을 차리고 카 레이서로 활약하기도 하다가 자동차 전문 엔지니어가 되겠다고 결심, 30대의 나이에 공업고등학교에 청강생으로 입학, 내연기관 제작 기초를 닦는다. 1946년 내연기관 전문 제작 회사인 혼다 기술연구소 설립. 그는 이때부터 경영은 후지사와 타케오에게 맡기고 자동차와 모터사이클 기술 개발에 전념한다.


 


대부분의 제조업체들이 서양회사와의 합작으로 제품을 생산하고 있었으나 혼다는 합작을 거부, 독자적인 기술개발에 전력을 다한다. 1959년 모터사이클로 미국 시장 진출해 초기 4년 동안 미국에서 판매되는 모터사이클 절반 가량을 독식하는 등 세계 모터사이클 메이커의 대명사로 자리잡음. 1962년 자동차 시장에 진출해 시장 확장에 성공한다.


 


혼다의 경쟁력은 전통적으로 제품의 완벽성이었음. 수많은 자동차 기업들이 품질 제일주의를 외치지만 지금까지 어떤 기업도 혼다만큼 기술적인 완벽을 추구한 적이 없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혼다는 장인정신 하나로 세계 시장을 제패해 왔음. 극에 달한 기술력으로 혼다는 최근 항공기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의 인공지능 로봇 아시모까지 개발해 세상을 놀라게 함. 오늘날 혼다는 도요타, 마쓰시다 전기 등을 제치고 소니에 이어 일본에서 두 번째로 가치 높은 브랜드로 인정 받고 있음.











성공한 기업, 이렇게 시작됐다: 시스코, 델 컴퓨터 외





사업은 아이디어나 기술이 아니라 “파는 것”이다, 3Com



창업자: 밥 메카프 (Bob Metcalfe)



제록스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있던 밥 메카프, 1973년 서로 떨어져 있는 여러 대의 PC를 연결해 주는 일명 "PC의 인터넷" 이더넷(Ethernet) 발명. 세계 최초의 LAN 기술, 이더넷은 여러 대의 PC를 이용하는 기업들로부터 엄청난 인기를 끌 것이 분명했음.


 


메카프는 곧바로 제록스 연구소에서 퇴직, 자신이 발명한 이더넷 기술로 사업을 시작함. 그러나 그는 아이디어나 기술이 곧 사업의 성공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3년 간의 “창업 공부”를 한 끝에 사업이 망하는 3가지 주요 원인을 정리함. 그 주요 원인은 다음과 같았다.



  • 첫째, 창립자의 오만(uncontrollable ego of the founder)
  • 둘째, 자금 부족(lack of money)
  • 셋째, 사업 집중력의 부족(lack of focus)

1979년 투자를 받고 자신의 네트웍 회사 3Com을 설립함. 그는 이때부터 자신이 직접 인텔과 DEC를 비롯한 IT 대기업들을 직접 찾아 다니며 세일즈를 시작, 수많은 기업들을 3Com의 고객으로 만듦. 창업주 메카프의 노력으로 3Com은 1990년대 2만 명의 직원을 거느린 50억 달러 가치의 회사로 발전, 포춘 선정 500대 기업이 됨.


 


메카프는 명문대 출신에 미국 내 최고급 기술 연구원이었음에도 체면과 자존심 다 버리고 사업의 성공을 위해 세일즈에 모든 것을 걸었음. 그의 성공 사례는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발명하는 일이 아니라 “물건을 파는 것”이라는 간단 명료한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다.


 



 



훌륭한 창업자가 훌륭한 CEO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시스코(Cisco)



창업자: 샌디 러너(Sandy Lerner), 렌 보삭(Len Bosack)



1980년, 미국 스탠포드 대학원의 두 명이 학생, 샌디 러너와 렌 보삭이 자발적인 힘으로 LAN과 LAN 사이를 연결하는 라우터(router) 제품을 실용화하는데 성공함. 라우터의 실용화가 세상에 알려지자 수많은 연구소와 대학, 그리고 기업들이 라우터 기술을 도입하기 위해 스탠포드 대학에 문의하는 등, 라우터는 엄청난 가능성을 지닌 사업 아이템으로 부각됨.


 


보삭과 러너는 자신들의 힘만으로 라우터 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심, 1984년 샌프란시스코의 작은 집에 사무실을 차리고 시스코(Cisco)라는 회사 이름을 짓고, 라우터 제작에 들어감. 이들은 투자를 얻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70곳 이상의 투자자들로부터 거절당함. 결국 모든 것을 창업자의 손으로 조달, 필요한 돈은 신용카드로 꺼내 쓰고, 필요한 물건은 직접 만들어 씀. 시스코의 창립자들은 하루에 15시간 이상 일에 매달렸고, 하루에 식사 한번, 이틀에 샤워 한번으로 만족했음.


 


결국, 이들이 제작한 시스코 라우터는 e메일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고, 입 소문에 의해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함. 시스코의 매출은 폭발적으로 증가, 1987년 미국 최대 벤처 투자사인 세쿼이어(Sequoia)로부터 200만 달러를 투자를 받고 시스코는 전세계적인 네트웍 기업으로 성장함. 오늘날 인터넷을 구성하는 전체 라우터의 80%가 시스코 제품일 정도로 시스코는 인터넷과 네트웍 업계 최강의 인프라 기업이 됨.


 


그러나 샌디 러너와 렌 보삭은 훌륭한 CEO가 되는 데에는 실패, 자신들이 일으킨 회사에서 퇴출 당하는 불운을 겪는다. 특히 샌디 러너는 지나치게 자유분방한 성격에 미숙한 “정치력”으로, 투자자, 이사회뿐 아니라 직원과도 사사건건 불화를 일으켰던 것으로 알려짐. (샌디 러너는 이후 유명 화장품 메이커 "어번 디케이"를 인수해 재기를 노림.)


 



 



단순화, 간소화, 자동화가 만들어 낸 신화, 델 컴퓨터(Dell Computer)



창업자: 마이클 델(Michael Dell, 1965년 생)



텍사스 대학에 다니던 19살의 마이클 델은 낮에는 수업을 듣고, 밤에는 컴퓨터 업그레이드 작업을 하는 주독야경 생활을 하는 컴퓨터 광이었다. 학점이 계속 곤두박질치자 그는 1984년 대학을 중퇴하고 1000달러로 자신의 회사 델 컴퓨터 창립함.


 


회사 설립 후 그는 자신이 직접 소비자로부터 주문을 받고, 자신이 직접 부품을 사다가 컴퓨터를 조립해 파는 방식으로 사업을 확장한다. 이 과정에서 중개업자는 100% 배제, 비용을 최소화 하고 가격을 혁신적으로 낮추는데 성공함.


 


그의 이런 “직접 마케팅(Direct Marketing)”과 “맞춤 제작” 방식은 고객으로부터 엄청난 호응을 얻었으며, 회사 측은 비용을 절감하고, 재고율은 0%으로 낮출 수 있었다. 델 컴퓨터의 매출액은 매년 50%씩 성장했고, 1988년엔 증시 상장, 2000년대엔 IBM과 컴팩 등을 제치고 오늘날 전세계 최대 규모의 글로벌 기업으로 발전한다.


 


델의 직접 주문 생산 및 직접 마케팅 방식은 인터넷 시대에 진정한 빛을 발함. 인터넷 등 IT 기술이 발달된 뒤로 델은 고객에게 들어오는 모든 주문을 전산화 해 이를 직접 공장 생산 시스템에 전달, 모든 것이 자동으로, 아무 오류 없이, 초스피드로 소비자에게 배송되는 시스템을 갖추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무엇이든 불필요한 단계를 제거하는 일에 상당히 흥미가 있었다”고 말하는 마이클 델의 집요한 간소화, 자동화 전략은 IT 시대에 최상의 효과를 거두었고,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 500대 부자에 가장 어린 나이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성공한 기업, 이렇게 시작됐다: 아마존, 야후 외





새로운 시장 진출은 이렇게 한다, 아마존(Amazon)



창업자: 제프 베조스(Jeff Bezos)



월 스트리트의 증권가의 억대 연봉 사원이었던 제프 베조즈, 1994년 인터넷 WWW의 사용량이 전세계적으로 일년에 2300%씩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 WWW를 이용한 사업을 결심함. 그는 인터넷에서 팔 수 있는 상품 중 가지 수가 가장 많은 것이 책이라는 사실을 깨달음. 책 소매업계에는 독점 기업이 없는 데다 수백만 권을 한꺼번에 파는 책방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한다. 인터넷과 컴퓨터를 이용하면 미국 내 있는 수백만 권의 책을 한데 모아 팔 수 있고, 이는 엄청난 경쟁력이 될 것이라 확신함.


 


1995년 가족 친지로부터 투자를 받고, 세계 최초의 온라인 서점이자 인터넷 상거래의 효시인 아마존(Amazon, http://www.amazon.com) 설립. 처음엔 사이트를 구축하면서 돈을 아끼기 위한 모든 수단을 동원함. 당시 아마존 직원들은 책상 살 돈도 아까워 헌 문짝을 조립해 책상처럼 만들어 썼다고 함. 당시 이 아마존 사이트에선 250만 종의 책을 검색할 수 있어 기존 가장 거대한 오프라인 서점보다도 100배 더 많은 물량을 제공함. 그리고 인터넷을 이용한 고객 관리 시스템, 제휴 프로그램 등의 디지털 마케팅 기술을 개발, 아마존을 e비즈니스 기술의 “모범 사례”로 만듦.


 


사이트를 열자마자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한 아마존은 1995년 51만 달러였던 매출이 1997년엔 1억 4700만 달러까지 늘어남. 1997년 18달러의 증시가로 주식 상장을 한 아마존의 주가는 1999년 여름 100달러까지 치솟아 베조스에 투자했던 사람들을 억만 장자로 만들어 줌.


 


베조스는 인터넷 서점의 가능성을 확신했으면서도 결코 섣불리 뛰어들지 않았음. 그는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출판 업자들을 만나고 다니며 서적 판매에 대해 정보를 얻으며 그들에게 조언을 구함. 시장의 선발 주자의 이점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자만하지 않았던 것은 성공적인 창업을 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였음.


 



 



인터넷 비즈니스 역사의 이정표, 야후(Yahoo!)



창업자: 데이빗 파일로(David Filo), 제리 양(Jerry Yang)



스탠포드 대학원생 데이빗 파일로와 제리 양은 인터넷에 있는 정보들이 너무나 난잡하게 흩어져 있다는 점에 주목, 스탠포드 대학에 할당된 자신들의 조그만 학생 서버 공간에 웹 사이트를 개설하고, 방문할만한 웹 페이지를 분류 별로 모아서 보여주는 서비스를 제공함. 이것이 오늘날 포털 서비스의 시초이자 야후!의 모태였음.


 


이 사이트를 바탕으로 1994년 4월 최초의 인터넷 포털(portal) 기업, 야후(Yahoo!) 설립. 당시 야후는 사용자들이 드넓은 인터넷 공간에서 정보를 찾아 헤맬 필요 없이, 모든 정보가 체계적으로 정리돼 있는 포털에서 원하는 정보로 손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해 줌.


 


1996년 IPO로 공개 기업 대열에 들어선 야후는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함. 1997년 온라인 e메일 사이트인 로켓메일(rocketmail.com: 야후 e메일 서비스의 기반이 됨)과 커뮤니티 사이트인 지오시티(Geocities), 브로드캐스트닷컴(broadcast.com)를 비롯한 콘텐츠 사이트들을 인수, 사업을 다각화 함. 1998년엔 야후! 쇼핑, 야후! 옥션 사이트를 개설해 전자상거래 사업에도 뛰어들었고, 1999년 "야후 메신저(Yahoo Messenger)"를 출시를 계기로 통신 사업까지 진출함.


 


이렇게 야후는 e메일, 커뮤니티, 콘텐츠 사업 뿐만 아니라 온라인 쇼핑, 금융, 기업 서비스까지 제공하면서 더 이상 "WWW 정보 접근 및 검색 서비스"가 아닌, 수많은 사업 모델을 운영하는 "글로벌 온라인 미디어" 기업으로 거듭남. 또한, 데이팅 서비스인 야후 퍼스널(Yahoo Personals), 구직 페이지(Yahoo Careers), 그리고 여행 중개 페이지(Yahoo Travel)와 같은 유료 서비스를 통해 수익원을 확충해 나감.


 


무엇보다 야후는 인터넷 사업체로는 최초로 회사 이름을 전세계적인 브랜드로 키운 기업이었음. 1996년부터 야후는 "Do You Yahoo?"라는 마케팅 문구 아래 TV, 인쇄 매체, 길거리, 스티커 등에 야후의 이미지를 널리 퍼뜨리며 대대적인 브랜딩 전략에 나섬. 야후의 공격적인 브랜딩 전략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야후는 오늘날 인터넷에서 가장 유명한 브랜드로 성장함. 


 



 



인터넷 업계의 장인정신, 구글(Google)


 


창업자: 세르게이 브린(Sergey Brin), 래리 페이지(Larry Page)



스탠포드 컴퓨터 공학과 대학원생이었던 세르게이 브린(Sergey Brin)과 래리 페이지(Larry Page)는 1996년 자신들이 만든 검색엔진 기술 다른 거대 포털 사이트에 팔려고 했음. 자신들의 신용카드로 빚을 내 장비를 구입하고 검색엔진 개발에 주력했지만 구글의 기술을 사겠다는 업체는 아무도 없었다.


 


결국 브린과 페이지는 자신들의 검색 기술로 회사를 세우기로 결정. 10만 달러를 투자 받고, 이 돈으로 카드 빚을 갚은 브린과 페이지는 다시 부모, 친지, 그 밖의 다른 투자자들로부터 100만 달러를 모금, 이 돈으로 1998년 “구글”이라는 회사를 설립, 검색 서비스를 개시함.


 


구글의 사업 모델은 “검색” 단 한가지뿐이었다. 검색엔진으로 시작한 다른 인터넷 기업들이 검색 기능을 기반으로 디렉터리, 뉴스, 커뮤니티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포탈 사이트로 발전한 것에 반해, 구글의 웹사이트에서는 오직 검색 창 하나로 사업을 전개함. 초기 구글은 트래픽을 늘리기 위해 아무런 마케팅을 하지 않았으며, 수익을 올리기 위해 광고를 유치하지도 않았음. 그들에게 최우선 과제는 오직 업계 최고의 수준의 검색엔진 기술을 만드는 것이었다. 검색 결과의 신속 정확함, 광고 하나 없는 깔끔한 사용자 환경 등, 오직 검색만을 위해 최적화된 구글 웹사이트 소문은 사용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빠르게 번져 나갔고, 이후 급성장을 거듭, AOL과 야후 등에 검색 서비스를 제공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수익을 얻기 시작함.


 


외부 기업에 검색 기술을 제공해 수익을 얻던 구글은 자사의 사이트 이용자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자체적인 검색 광고 서비스를 제공, 엄청난 수익을 올리기 시작함. 오직 검색만을 위해 태어난 구글은 미국 검색 시장의 50% 이상을 장악하고 이용자의 수가 엄청나게 많아지면서 뉴스, 커뮤니티, 번역, 데스크 탑 검색 등의 서비스로 확장하기 시작함. 이에 기존 포털 업체인 야후의 위치마저 위협하고 있음.


 



 



온라인에서 재현된 그리스 민주주의, e베이(eBay)


 


창업자: 피에르 오미디아(Pierre Omidyar)



프랑스 태생의 피에르 오미디아는 부모를 따라 6살 떄 미국으로 이민, 미국 터프츠(Tufts) 대학에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전형적인 “공돌이”였다. 1988년 대학 졸업 후 8년간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하던 오미디아는 1996년 취미 삼아 이베이(eBay, http://www.ebay.com)라는 무료 전자상거래 사이트를 제작, 운영한다.


 


이베이의 사업 아이디어는 인터넷 사용자들이 서로 알아서 물건을 팔 수 있게 하는 “온라인 장터”를 제공하는 것이었음. 기존 시장은 판매자보다 소비자가 많아 제품 수도 제한돼 있고 제품의 가격도 주로 판매자에게 유리하게 조정되지만, 이베이에서는 다수의 판매자와 다수의 소비자가 한꺼번에 참여하기 때문에 제품의 종류나 가격이 훨씬 다양함.


 


이베이의 이런 서비스는 입 소문을 타고 순식간에 유명해지기 시작, 결국 사용자가 너무 많아 서버를 증축해야 할 상황까지 온다. 오미디아는 서버를 증축하는 대신 늘어난 사용자를 줄이기 위해 유료화를 시작한다. 사용자는 줄긴커녕, 오히려 계속 늘기만 해 결국 오미디아는 자신의 집에 사무실을 차리고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전자상거래 사이트인 이베이를 건설한다.


 


이베이에선 매년 90억 달러 이상, 1억 가지가 넘는 아이템들이 거래되고 있지만, 회사 내에는 물품 인벤토리도, 창고도, 영업 부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 간의 거래가 성사되고 난 뒤엔 송금과 물건 배송까지 각자 고객들이 책임지기 때문이다. e베이는 이렇게 사람들이 자유롭게 거래를 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주고 있을 뿐. e베이는 거래가 이뤄진 물품에 대해 1-5%의 중개 수수료(커미션)를 받아 수익을 올린다. 웹 사이트에 회원 수만 늘리면 이들이 알아서 아이템 거래량을 높여 줄 것이고, 거래량이 높아지면 자동으로 수익도 증가하니 단순하지만 확실한 수익 구조.


 


판매하는 제품을 스스로 홍보하고, 결제하고, 운송할 필요가 없는 e베이는 그만큼 회사의 운영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전통적인 오프라인 소매상인 월 마트(Wal-Mart)의 경우 아이템의 종류, 수량, 가격, 마케팅, 운송 등 모든 것을 책임지기 때문에 막대한 운영비용을 감당해야 했으며, 장기 부채가 160억 달러에 이르고 있다. 반면 e베이에는 아무런 부채가 없으며 1998년부터 매 분기 흑자를 기록하며 급성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