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
속눈썹맨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최근에 받은 트랙백

글 보관함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최근 입법 예고된 ‘첨단기술 유출의 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안)’은 과학기술인들에게 큰 충격과 혼란을 주고 있다.

국가경쟁력을 보호·증진하기 위해 핵심 기술을 특별 관리하는 조치가 필요하다는 현상적 요구는 인정하지만, 이 법안에 함축된 여러 독소조항과 과학기술 연구개발 인력에 대한 악의적 시각은 실망을 넘어 공분을 느끼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법안의 내용을 간략히 들여다보고, 이공계 기피 현상에 대한 공론화를 끌어내보고자 한다.

고등학교 학생들이 이과 선택을 기피한다는 이른바 ‘이공계 기피 현상’이 대대적으로 언론에 회자되기 시작한 때가 지난 2002년 초이다. 이공계 인력이 나라를 먹여살리는 사람들이라는 인식에 별다른 이견이 없었는지, 이과 선택률 감소와 그에 따른 이공계 대학 진학률 감소 현상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각은 대체로 방치해서는 안 될 국가적 위기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이공계 배출 인원이 실제로 줄어들거나, 주요 이공계 대학이 정원을 채우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수능 성적 상위 그룹이 대거 의약 계열로 돌아서고, 이미 이공계에 발을 들여놓은 대학생과 대학원생들이 동요하고, 직장에서는 연구 현장을 떠나는 핵심 인력이 발생하면서, 이공계 위기는 고교 교육과 대학 입시만의 문제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대학과 정부는 이미 2001년 봄 자연계 대학 지원자 감소 추세가 뚜렷한 방향성을 갖고 진행 중인 사회 현상이며 일시적 현상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처음에 정부는 장학금과 유학 지원 등의 유인책과 교차지원 축소 등의 입시제도 개선을 통해 일단 고등학생들의 이과 선택률을 높이기 위한 대증요법을 동원했다.

그러나 전반적인 이공계 상황 및 배출 인력의 사회적 처우 개선 없이는 땜질 처방이나 고름을 더 썩게 만드는 미봉책에 그칠 뿐이라는 거센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급작스레 끓어오른 이공계 위기 담론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건너뛰고 심지어 이공계 위기를 일단 해결하고 보자는 식의 여러 가지 대책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왜 이공계에 실체적인 위기가 닥쳐왔는지에 대한 진단부터 시작해서 열악한 이공계 상황에 대한 현상과 그에 대한 원인 분석이 차근차근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했을 것이다.

허리가 부러진 이공계
2002년 당시 이공계 상황에 대해 청취할 수 있는 채널이 극히 협소하고 국부적이었는데,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과학기술계 상층부라 할 만한 원로 과학자, 교수, 그리고 대기업 연구 담당 임원들이었다. 따라서 정부의 대책은 고교 교육 측면에서의 이과 유입 유인책과 과학기술계 상층부의 요구를 달랠 수 있는 위로책으로 나뉘어 발표되었다.

움직이지 않는 병든 말을 움직이기 위해 뒤에서 엉덩이를 밀고 앞에서 고삐를 잡아당기는 형국인데, 허리가 부러진 말이 쉽게 움직일 리가 만무하다. ‘경력 경로(career path)’라는 개념에서 보자면 시작 부분과 끝 부분만 들여다보았으니,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중간 부분을 간과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핵심적인 몇 가지 이공계 대책-유학 지원, 이공계 대학 신입생 장학금 지급, 영년제 연구원 도입, 과학기술 명예의 전당 설립, 과학기술인 추모 묘역 조성 등등-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거나 거센 반발에 부딪혔고, 일부는 이미 잊혀져가고 있다. 2003년 초 주요 대학의 입시 결과는 이공계 기피 현상의 상시화, 대세화를 보여주었고, 우수 인재의 의약 계열 편중은 더욱 심화되었다.

결국 각종 대중요법과 유인책, 위로책에 대한 회의론이 일어났고, 새로 출범한 참여정부는 이공계 상황의 핵심적 피해당사자인 현장의 젊은 과학기술인들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80년대 초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이공계 전성기에 대학에 입학·졸업한 이들로, 이공계 대학 정원의 폭발적 증가에도 불구하고 인기 상종가를 누리던 시기를 경험한 다수의 우수 인재들로서, 현재 연령대로 보아 20대 후반부터 40대 초반까지를 아우르는 그야말로 연구개발과 산업생산 현장의 핵심 인력들이다. 구체적으로는 대학원생, 신진 연구인력, 소장 교수, 그리고 정부출연 연구소와 기업 연구소의 선임~책임급 연구원에 해당한다.

70년대 귀국파 ‘유치 과학기술인’들이 국내 연구개발의 기틀을 닦고 후학 양성에 크게 기여했다면, 지금의 현장 과학기술인들은 80년대 말~90년대 중반 우리나라의 고도성장을 직접 손으로 이루어낸 주역이라 할 수 있다.

IMF 사태 이후(직접적 연관성이 있는지에 대한 검증 여부를 차치하고라도 시기적으로) 이들이 처한 열악한 상황이 결국 이공계 졸업자에 대한 어두운 전망과 인식을 낳았고, 고교생의 이과 선택 감소와 현장 인력의 이공계 이탈을 가져왔던 것이다. 즉 처방이 필요한 곳은 허리였고, 사기를 북돋우고 현실적 지원을 쏟아야 하는 곳은 원로와 기득권층, 보직자와 간부가 아닌 연구실을 밝히는 젊은 연구원과 생산 라인을 지키는 기술자였던 것이다.

언론과 정부, 사회 각계에서도 이공계 위기 원인에 대한 인식에서도 진일보한 면을 보였고, 이공계 병역대체 복무제도 개선과 이공계 공직 진출 확대 방안과 같은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대책들이 발표, 시행되었다.

희망적인 분위기, 그러나!
이러한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현장 연구개발자, 과학기술인, 그리고 이공계 학생과 지망생들의 동요는 어느 정도 다독여지기 시작했다. 끝을 모르고 이어지던 이공계 탈출 러시가 사그러들고 이러다 말겠지 하던 연구 현장에서도 정부정책 기조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금년 들어 정부출연 연구소와 이공계 대학에 대한 비정규직 조사에 이어 대책이 마련되고 있고, 전문 연구 요원의 5년 복무 기간도 4년을 거쳐 3년으로 줄이는 개정법안이 국회 통과를 기다리고 있으며, 폐지된다던 산업기능 요원 제도도 존속키로 되었다.

이공계 공직 진출 확대 방안이 본격 실시되어 53명의 5급 특채가 진행 중에 있고, 실험실 안전 환경 개선을 위한 정책적, 입법적 노력이 진행되고 있으며 이공계 대학원생 지원방안이 연구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제 현장의 젊은 과학기술인들은 정부 정책의 대상 집단으로서 침묵하며 ‘주는 대로 받고 때리는 대로 맞던’ 과거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며 정책 입안과 형성에 참여하고 있기에, 그래도 무언가 조금은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 정부 일각에서 소리소문 없이 준비하여 입법을 예고하고 있는 ‘첨단기술 유출의 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안)’(이하 기술유출방지법이라 함)은 과학기술인들의 믿음에 큰 균열을 일으키고 희망적인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으며 정부에 대한 기대를 한번에 허물어뜨렸다.

국가경쟁력을 보호·증진하기 위해 핵심 기술을 특별 관리하는 조치가 필요하다는 현상적 요구는 인정할 수 있으나, 이 법안에 함축된 여러 독소조항과 과학기술 연구개발 인력에 대한 악의적 시각은 현장 과학기술인들에게 실망을 넘어 공분을 느끼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법안의 내용을 간략히 들여다 보면, 기술 유출에 대한 처벌 대상을 대학, 연구소 등으로 확대하고 처벌을 강화하며, 국가 핵심기술의 매각 또는 이전시 정부 승인을 의무화하며, 기술보안을 강화하기 위해 관련 위원회, 협회, 자격 제도를 신설하고 보안 관련 산업 육성을 지원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법안의 여러 가지 문제들
기술유출방지법의 문제점을 몇 가지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연구개발 인력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며 인적 통제를 강화하려 하고 있다. 둘째, 기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보호해야 할 기술의 정의와 범위를 설정하는 데 있어 한계를 가지고 있다.

셋째, 기술 유출 방지와 기술 확산 독려라는 상충점에 있어 균형을 찾지 못하고 있다. 넷째, 지나친 규제와 통제로 현장의 연구개발 의욕과 창의성을 저하시킬 우려가 있다. 다섯째, 이 법의 시행으로 인한 수혜 집단은 대기업에 국한되며, 중소기업과 연구개발 인력은 일방적 피해자가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나마도 애초 입법 필요성의 핵심이라 할 해외로의 기술 유출의 방지에는 효과적이지 못해 국내용으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기술유출방지법(안) 자체에도 이와 같은 여러 문제점이 눈에 띄게 드러나 있는데, 그에 그치지 않고 추가적으로 발표된 대책을 보면 거의 아연실색할 만한 내용이 있다. 바로 연구개발 인력에 대해 일정 기간(일반적으로 1년) 전직을 제한하고 동종업체에 취업을 금지토록 하는 서약서 징구를 의무화하겠다는 것이다.

한국과학기술인연합(www.scieng.net) 홈페이지에서 1만여 명 가까이 이 법안 입법화에 반대하는 서명을 남기고 있는 것도 이 대책에 대한 극도의 반감을 드러낸 것이다. 이미 많은 기업에서 연구개발 인력이 입사 또는 퇴사하는 시점에서 이와 같은 조항이 들어있는 각서, 계약서, 또는 서약서를 쓰도록 강압하고 있으며(도장을 찍지 않으면 퇴직 처리를 해주지 않는다.) 특허청 홈페이지에는 이 서약서의 견본양식까지 올려놓았을 정도로 정부에서 은근히 유도해오고 있었다.

이로 인한 퇴사자들의 피해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전직만으로 아무 죄없이 심야에 가택수색을 당한 사람, 하루에 300만원이라는 거액의 손해배상에 휘말린 사람 등이 부지기수이다. 이번에 기술유출방지법안과 함께 발표된 기술유출방지대책에 바로 이 전직 제한, 취업 금지 서약서를 모든 기업에서 받도록 유도하겠다는 내용이 들어있는 것이다.

비록 법안 자체에는 조항으로 포함되지 않았다고 하나, 이 법이 시행될 경우 법에 의해 실시되는 보안인증제, 보안관리사 등에 의해서 또는 추가 제정되는 시행령, 각종 지침, 내규 등에 의해서전직제한 조치가 취해질 여지와 가능성이 남아 있다. 심지어 전직을 준비하기만 해도 ‘예비 음모’죄를 적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기존의 관련 법률에서는 기술 유출을 ‘기술을 외부인에게 전달하는 행위’로 규정하였으나 새 법에서는 ‘기술을 기관 외부로 가지고 나가는 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한마디로, 이메일이든 쪽지든 파일이든 무엇 하나라도 개인 PC나 집에 있는 디스크에서 발견되면 기술 유출 범죄자가 되는 것이다.

박찬호와 이공계 종사자의 다른 점
근래 몇 년간 성적이 영 시원치 않기는 해도, 박찬호가 LA 다저스에서 텍사스 레인저스로 팀을 옮기며 천문학적 연봉 계약을 체결하자 많은 국민들이 마치 자기 가족의 일처럼 기뻐하고 뿌듯해 했다.

“다저스에서 메이저리그에 입성하고, 최고의 투수 코치들에게 지도를 받아 기량이 일취월장한 데다가, 찬호는 다저스 타자들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경쟁팀인 텍사스로 가서는 안되지 않느냐. 정 옮기고 싶으면 최소 3년간 야구를 쉬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LA가 박찬호를 수련시킨 이유는 자신들의 성적을 위해서였으며, 제고된 능력과 쌓은 승수는 고스란히 박찬호의 것으로 남는다. 이는 지극히 상식적이다. 같은 일이 과학기술계 연구개발자의 경우에는 영 거꾸로 일어난 것이다.

치고 올라오는 중국을 비롯한 후발 개도국에 우리나라의 핵심 기술이 넘어가서는 안된다는 점은 인정한다. 또, 특허를 비롯한 지적재산권의 보호는 기술개발 활동에 대한 핵심적 지원제도이며 혁신에 대한 가장 효과적 인센티브라는 점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급변하는 기술의 격랑 속에서 과학기술인에게 1년의 공백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이다. 직장을 옮기지 못하니 몸값을 올리기는커녕,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해도 저항할 방법이나 하소연할 곳도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현 직장에서 정년을 보장한다든가 ‘타사에 빼앗겨서는 안될’ 핵심 인재 대접을 해 주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결국 연구개발직으로 일하려면 남의 노예가 되어 입 닫고 귀 막고 주는 대로 받으며 일만 하다가 쓸모없어지면 버림받는 팔자를 감내하라는 뜻인가.

대기업인 L모 전자에서 퇴사한 연구원 몇 명이 경쟁사로 옮겨갔다 하여 벌어진 소송 사태가 지금도 진행 중이다. 법원은 전직을 금해달라는 대기업의 손을 들어주었고, 멀쩡히 연구 중인 연구원들에게 손을 놓고 1년간 놀라고 명했다. 이도 모자라 최근에는 1인당 하루 300만원의 손해배상을 전 직장에 내놓으라는 판결까지 나왔으니 직장 옮기기가 국적 바꾸기보다 어려운 지경이다.

정부와 법원의 인식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이유는, 절대적 강자인 대기업과 약자인 연구원 사이에서 대기업의 손을 들어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국가적 혁신에 도움이 되는 방향이 아니기에 혹 그들의 공부와 생각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심각한 우려가 들기 때문이다.

L모 전자의 주장은, 핵심 연구원들이 빠져나가 디지털 카메라폰 개발 경쟁에서 우위를 빼앗겼으며, 그 손실이 매우 막대하다고 주장한다. 연구원이 새로 자리를 잡은 P모사의 경우 작년부터 급격한 매출 신장을 이루었으니 연구원 몇 명의 효과가 대단함을 실감할 수 있고, 연구원을 빼앗겼다고 스스로 피해의식을 느끼는 L사 입장에서는 분통터질 노릇이겠다.

그럼 현재 상황은 어떠한가. P사의 약진으로 위기감을 느낀 L사와 다른 S사 등이 더욱 노력을 경주하여 디지털카메라폰 시장이 조기에 성숙하고, 다양한 제품들의 경쟁으로 소비자는 좋은 제품을 일찍, 좀 더 싼 가격에 만날 수 있게 되었고, 외국에서 국산 카메라폰의 인기는 하늘을 찌른다고 한다.

연구원을 놓친 L전자는 이를 악물었는지, 300만화소에 스테레오 음향의 신제품을 계속 내어 놓아 브랜드 이미지를 더욱 확고히 하고 있다. 이 정도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꿩먹고 알먹고 둥지헐어 불 쬔 격이 아닌가?

최근 각광받는 과학기술정책 이론인 혁신체제론에 따르면, 시스템 실패의 여러 유형 중에 ‘전유(專有)성 함정(Appropriability trap)’이라는 개념이 제시되었다. 그 이론에 따르면 지적재산권 제도나 영업비밀과 개발기술의 보호 등이 너무 강력하게 적용될 때 기술과 지식의 확산과 활용이 제한되기 때문에 산업 전체적으로 볼 때 기술개발 활동에 제약을 가져온다고 한다.

기술의 확산, 지적 자산의 유동, 우수 연구인력을 포함한 혁신 자원의 활용, 그리고 혁신 주체들의 상호작용을 활발히 하는 것은 국가 혁신에 있어서 지향해야 할 과제로 인식되고 있다. 전직한 연구원들은 L전자에 약간의 타격을 주었을 수 있지만, 관련 산업 전체로 보아 혁신을 이끌어냈다고 평가할 수 있고, P전자를 통해 국부 증대에 이바지한 것이다.

시스템 실패를 방지하기 위한 정부 정책의 역할은 자명하다. 전유성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정부는 적절한 수준에서 연구개발 인력의 유동을 보장하면서도 원소속 기업과 타협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지적재산권은 보호하되 연구원 머리 속에 들어있는 지식과 경험에까지 이동에 벽을 쳐선 안된다.

현실은 이와 정반대로, 대기업 편에 서서 연구개발자의 인권마저 침해하는 ‘동종업계 취업 금지’ 대책이나 내어 놓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정부에서 범하고 있는 심각한 오류
저명한 SF 작가인 필립 K. 딕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페이첵’에서, 연구개발이 끝난 뒤 주인공인 기술자의 기억을 지워버리는 내용이 나온다. 이대로라면 기억을 지울 수 있는 기계가 개발되기라도 하면 가장 앞서 나서서 ‘기억삭제법’을 제정하겠다고 나설 태세다(현 과학 수준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새삼 위안이 된다).

기술유출방지법안의 독소조항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벌써 과학기술계가 뒤숭숭하다. 더 험한 꼴 당하기 전에 모두 제 대접을 받으며 일할 수 있는 선진국이나 경쟁국으로 떠나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 공공연하게 들린다. 과학기술인 출국금지법, 해외취업금지법이 만들어지기 전에 말이다.

이번 법안과 대책을 만들면서 정부는 대체 몇 명의 현장 과학기술인들을 만나서 그들의 의견을 물어 보았을까? 유출되면 안될 핵심 기술이 무엇인지 정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인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할 것이다. ‘1GB 이상의 메모리 기술’ 이런 식으로 기술을 정의하는 것이 얼마나 폭소스럽고 무의미한 일인지 과학기술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과학기술 연구개발 인력은 기술을 유출할 잠재적 범죄자가 아니고, 자신이 개발한 기술을 진심으로 아끼고, 무엇이 보호되어야 하는지, 국가가 어떻게 도와주어야 그 기술을 잘 보호할 수 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을 동료가 아닌 적으로 규정한다면 그런 법이나 대책은 결코 성공할 수 없으며 국가 경쟁력 향상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예쁜 딸을 누가 훔쳐가거나 외간 남자랑 눈 맞아 달아날까봐 문을 밖에서 꼭꼭 걸어 잠그고 감시한다면 그 딸은 행복하기는커녕 점점 아름다움을 잃어가다가 노처녀로 늙어 죽거나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정부는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 국가 발전을 위하는 기술에 대한 태도인지 깨달아야 한다.

과학기술인들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타협하며, 서로 신뢰를 쌓아 나가야 한다. 직업 만족도를 증가시키고 자긍심을 가짐과 동시에 사회적, 경제적으로 상대적 소외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외적에 맞서기 위함이라며 든 칼끝을 우리 군사에 돌리는 우를 범하지 말라. @